이사 갔습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워드프레스 써 보고 싶은 마음에 이사 했습니다.

여기에 쌓아 놓은 글들이 많아 모든 글을 옮기지 못 한 관계로 이곳 티스토리 블로그는 지우지 않고 그냥 둘 예정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글은 여기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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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공부] 부의 기원/ 9. 진화: 그건 바로 저기에 있는 정글이다

  • 조직, 시장, 경제는 생태 시스템과 단순히 비슷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진화 시스템이다.
  • 진화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혁신적인 해법을 찾기 위한 다목적용의 고도로 강력한 처방전이다. 이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지식을 축적해 가는 하나의 학습 알고리즘이다. 진화는 자연 세계의 모든 질서, 복잡성 그리고 다양성을 설명해 주는 공식이다.


디자이너 없는 디자인

  • 진화 이론가이자 터프츠 대학의 인지과학센터 소장인 대니얼 데닛은 진화를 '디자이너 없이 디자인을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부른다. 
  • 우리가 어떤 무엇이 디자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의 목적을 가진 다시 말해 어떤 과업에 적합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망치는 못을 박거나 뽑도록 디자인되어 있고, 박테리아는 특정한 환경에서 생존하고 재생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우리는 또 디자인을 가진 것들에 대해 거기에는 어떤 수준의 복잡성, 질서, 구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해변에 있는 임의의 모래알이 디자인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잡한 구조를 갖는 제트 엔진, 나선형 방으로 된 조개껍데기, 복잡한 음들의 배합으로 이루어진 음악 등은 모두 디자인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  디자인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 짓는 것은 바로 목적에 대한 적합성과 복잡성의 결합이다. 줄무늬 있는 암석은 우리 눈에 아름답게 보이고, 복잡한 패턴도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예술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떤 기능을 갖고 있거나 어떤 특정한 목적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임의의 지질학적인 힘들의 작용으로 우연히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디자인된 것들은 엔트로피가 낮다. 다시 말해 디자인된 것들은 결코 임의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의미다.
  • 우리가 디자인을 보는 영역은 두 가지다. 생물 세계에서, 그리고 생물들이 만들어 낸 인위적 산물들에서다. 캥거루의 점프를 위한 다리, 어둠 속에서 물체를 탐지하는 박쥐의 음파 탐지기, 수분을 촉진하기 위해 꿀벌 성기로 위장한 꽃 수술 등이 생물 세계에서 디자인 된 것들이며 나사를 돌리기 위한 드라이버, 사람들을 수송하기 위한 점보제트기는 인위적인 디자인 산물들이다.
  • 영국 국교회 사제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페일리는 시계처럼 복잡하고 디자인된 특별한 것은 시계 제조업자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자연 세계의 복잡성과 디자인은 성스러운 시계 제조업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고도로 디자인된 것들은 저절로 이 세계로 튀어나온 게 아니다. 디자인은 목적, 지능 그리고 문제 해결을 보여 준다.
  • 그러나 바로 이것이 진화가 하는 일이다. 진화는 스스로 디자인을 창조한다. 옥스퍼드 대학 진화 이론가인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를 "앞이 보이지 않는 눈먼 시계 제조업자" 라고 불렀다. 진화는 맹목적이고 기계적이며 단순한 공식이지만 영리한 디자인을 창조하는데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다.



인공적 생물

  • MIT 미디어랩의 전 멤버였던 칼 심스는 1994년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연구해 보고 싶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박테리아와 과일 파리를 가지고 하는 실험이 아니라 좀 더 빠르고 더 많이 통제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실험이었다. 그래서 그는 슈퍼컴퓨터에 인공적인 컴퓨터 생물들이 사는 가상의 진화 세계를 만들었다. --슈퍼컴퓨터와 칼 심스의 프로그래밍 재능이 없었다면 아마도 맥시스의 '심라이프'와 MS의 '임파서블 크리처스'와 같은 여러 상업용 컴퓨터 게임들을 이용한 가상적인 진화 실험을 경험했을 것이다.-- 각 생물들의 몸은 상호 연결된 일련의 직사각형 블록들로 구성되어 있다. 블록은 정육면체, 짧고 두꺼운 직사각형, 길고 얇은 직사각형 등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질 수 있다. 각 블록들은 관절이 있어서 구부리거나 펼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이 블록 생물은 움직임을 조절하는 간단한 컴퓨터 칩의 힘으로 관절이 달려 있는 블록 몸체들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다. 심스는 각 블록 생물에 목표를 주었다. 각 생물은 그 목표에 비추어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몸에 있는 센서를 통해 평가한다. 그 후 각 블록 생물들은 관절로 연결되어 있는 각 블록 몸체들을 움직임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을 취한다. 첫 번째 실험에서 이 인공적 생물들에 주어진 목표는 가상의 강을 빠르게 헤엄쳐 건너가는 것이었다.
  • 그리고 심스는 이 블록 생물들의 세계에 생물학적 변화를 주었다. 바로 컴퓨터 DNA를 부여한 것이다. DNA는 1. 각 생물 몸체의 형상 2. 관절로 연결된 블록 몸체들을 움직이는 방법 3. 뇌의 초기 상태에 관한 정보들을 각각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심스는 일련의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완전히 임의적인 컴퓨터 DNA, 그리고 완전히 임의적인 블록 몸체들을 가진 300개의 블록 생물들로 각 실험을 시작했다.
  • 심스는 생물들을 컴퓨터 안의 가상 수영장에다 풀어 놨다. 임의적으로 디자인된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허우적거리고 넘어지거나 물에 빠졌다. 그러나 우연히도 몇 개는 조금이나마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자신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동작 또는 스스로 방향을 잡는 능력 등이 그것이다. 
  • 심스는 1세대인 임의의 생물들에게 간단한 진화의 공식을 적용해 봤다. 가장 성공적인 수영을 한 생물들은 그대로 남았고, 수영에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생물들은 제거 됐다. 그 뒤 수영에 가장 성공적인 블록 생물들은 자신들의 컴퓨터 DNA를 서로 교환하는 컴퓨터 섹스를 통해 양 부모의 특성들을 그대로 이어받는 새로운 생물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새로운 생물들은 자신들의 DNA를 변화시키는 임의의 돌연변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 정리를 해 보면 블록 생물들의 집단은 서로 다른 특성, 즉 변이를 보여 주었다. 특정한 시점에서 생물들의 수영 능력은 다양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들은 선택되었고, 성공적인 생물들은 재생해 그 디자인을 확산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변이, 선택, 그리고 재생(복제)이라는 이 단순한 공식이 약 100세대까지 계속 반복 되었다. 20-30세대를 거치자 볼품없이 이리저리 허우적거리고 넘어지던 블록 생물들이 실제로 수영을 할 수 있는 그런 생물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 일부 생물들은 등 뒤에 펄럭이는 꼬리를 가지는 등 크고 핵심적인 몸체를 발전시켰다. 어떤 꼬리는 돌고래처럼 위아래로 움직였고 또 어떤 꼬리는 상어처럼 옆으로 움직였다. 몇몇 생물들의 경우 다양한 물고기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몸을 안정화 시키는 지느러미가 돋아나기도 했다. 또 다른 생물들은 길고 가느다란 몸체로 발전했는데, 많은 부분들이 서로 연결돼 마치 뱀처럼 꼬리를 휘둘렀다. 또 다른 생물들은 작은 팔을 많이 가진 형태로 발전해 노래기 같이 회전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생물들은 매우 우아한 해마 모양으로 진화했다.
  • 진화의 알고리즘은 수영을 잘하기 위한 단 하나의 최고 방법, 최적의 방법을 찾은 것은 아니기만 대니얼 데닛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화 공식들은 여러 가지 '생존을 위한 좋은 기술'을 찾아 냈다. 물에 관한 기초 물리학은 무한하지는 않지만 많은 수의 운동 방식을 허용한다. 물속에서 작전을 펴려면 또한 지느러미나 유체역학적인 몸체로 균형을 잡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물의 물리학은 수영하는 데 성공적인 몸의 디자인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제약 조건들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것은 모든 수생 생물들이 인간이 만든 잠수함과 기계들이 그러하듯이 어떤 목적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다른 특성, 즉 변이들로 구성되는 이유다. 이것은 또한 심스의 블록 생물들이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재빠르게 이런 성공적인 디자인들을 발견한 이유다.
  • 심스의 컴퓨터 진화가 복잡한 제약 조건을 가진 세계에서 좋은 기술을 발견하는데 성공한 것은 단지 수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심스는 생물들에게 가상의 중력을 가진 평평한 표면에서 걸어가라는 목표를 주고 비슷한 실험도 했다. 다시 진화 공식이 20-30회 거듭되자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던 생물들이 진화를 했다. 기어가고, 깡충깡충 뛰고, 굴러가고, 심지어 두 다리로 걸어가는 생물들은 물론이고 게처럼 허둥지둥 달리는 생물, 뱀처럼 미끄러지듯이 가는 생물들이 나왔다. 또한 가상의 음식 블록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실험에서는 각 블록 생물들이 팔, 갈고리 발톱, 입 등을 진화시켰다.
  • 심스는 각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생존 해법들 중 그 어떤 것도 사전에 전제하지 않았다. 진화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었을 뿐이다. 각 블록 생물들에 대해 어떤 디자인도 하지 않았다. 즉, 지느러미, 꼬리, 다리, 발톱 등에 관한 것은 프로그램에 없었다. 이런 디자인들은 발견된 것으로서 많은 세대에 걸쳐 진화 과정을 겪으며 밑에서부터 출현한 것이다. 지난 수백만 년에 걸쳐 생물들에게 눈알, 방호를 위한 위장술, 악취를 뿜어내는 기술 날개, 다른 손가락과 마주할 수 있는 엄지손가락 등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혁신적인 디자인을 가져다준 것도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였다. 



혁신을 위한 알고리즘

  • 알고리즘은 하나의 처방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투입 요소들을 넣고 어떤 과정을 통해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그러고 나서 지시사항대로 따르면 어떤 산출물이 확실히 나온다는 그런 처방전이다. 데닛은 알고리즘의 또 다른 보기로 토너먼트를 들었다. 누군가 또는 어떤 기관에서 선수들을 투입하고, 주어진 규칙대로 과정을 거쳐 승자라는 하나의 결과를 확실히 내놓는다. 토너먼트 과정은 꽤 일반적인 알고리즘으로 수많은 기질에도 사용될 수 있다. 여기서 기질이란 알고리즘이 움직이는 바탕이 되는 물질 또는 정보를 생각할 수 있다.
  • 어떤 알고리즘은 기질 중립적(substrate-neutral)이다. 즉, 이런 알고리즘을 분해해 보면 어떤 기초적인 환경 조건이 충족되는 한 기질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작동하는 기본적인 핵심들을 보유하고 있다. 에컨대 가장 큰 것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분류하는 알고리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알고리즘은 사과를 분류하거나 성의 길이를 분류할 때 유용할 수 있다. 이 경우 알고리즘을 정의하는 것은 특정 기질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논리다. 분류 알고리즘은 사과나 성을 물리적으로 분류하는 게 아니라 사과의 무게나 이름 철자의 길이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작업을 한다. 알고리즘들은 정보를 처리하는 공식들이다. 이것은 사실상 컴퓨터 프로그램들이다.
  • 진화는 기질 중립적인 하나의 알고리즘이다. 디자인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정해진 대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정보를 처리한다. 진화는 또한 순환적이다. 즉, 한 사이클의 산출물은 다음 회에 투입물이 된다. 이런 순환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화를 멈추게 하지 않는 한 계속 돌아간다는 얘기다. 데닛의 토너먼트 사례 또한 순환적이다. 전 게임의 결과 --예컨대 준결승-- 는 다음 게임 --결승-- 의 투입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승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는 언제 멈출지 미리 결정된 게 없다. 태양이 폭발할 때까지, 지구가 더는 살기에 적합하지 않을 때까지 진화는 순환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레고 도서관

  •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생물학자이자 진화 이론가인 스튜어트 카우프만이 레고 조립게임에서 이겼는데, 당시 매우 간단한 빌딩 블록에서 출발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디자인으로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를 주제로 진화를 연구하고 있던 카우프만에게는 특히 적합한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레고의 가장 큰 매력은 단순하고 여러 색깔을 가진 블록들이 무수히 많은 방버븡로 조합되어 흥미롭고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 가장 간단한 블록들조차 수많은 치환 또는 변화을 통해 여러 가지로 조립될 수 있다. 예컨대 1by2 직사각형 블록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면 --예컨대 색깔이 다르다면-- 14가지 다른 방법으로 조립될 수 있다. 만약 2by2 블록 두 개라면 33가지 방법으로 조립될 수 있다. 블록의 수, 크기, 부착 방법의 수가 늘어나면 바꾸어 조립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적당한 크기의 레고 세트라고 해도 이를 통해 만들 수 있는 가능한 구조물으리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는 유한하다. 진화 이론가들은 이런 가능한 변환의 집합을 '디자인 공간(design space)'라고 부른다. 창조라라는 이름의 레고 세트에 500개의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레고들이 있다고 하면 여기서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레고 블록 디자인은 대략 10120개나 된다. 대니얼 데닛의 용어를 빌려 이 디자인 집합을 '모든 가능한 레고 디자인 도서관'ㅇ라고 부를 것이다. 이 도서관은 우주 자체 --우주는 단지 약 1080개의 원자들을 갖고 있다.-- 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모든 선반들이 고유한 레고 디자인을 위한 지시 사항들을 적어 놓은 종이 노트 카드들로 꽉 들어찬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레고 도서관을 두리번거리다 우연히 노트 카드를 집어 든다면 너무도 많은 수의 디자인들이 정말 지루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한 개의 푸른색 2by2 블록을 빨간색 2by2 블록에 다른 방법으로 부착하는 디자인의 수 33가지, 노란색의 2b2 블록에 부착하는 또 다른 디자인이ㅡ 수 33가지 등 단지 두 개의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블록을 연결하는 방법만도 수백만 가지이고, 세 블록을 연결하는 데는 수조 가지나 된다.
  • 그러나 도서관 한복판 어디엔가는 7년간 씨름할 정도로 의욕 속에서 만들어진 384개의 블록으로 구성된 찬란한 레고 우주선 디자인이 박혀있다. 마찬가지로 405개의 블록으로 만들어진 레고 성 디자인은 물론 220개의 블록으로 된 환상적인 레고 말 디자인도 있다. 또한 앞의 성과 똑같은 디자인에 단지 1개의 블록이 추가된 406개의 블록으로 된 레고 성 디자인도 있다. 이렇게 단지 블록 1개 차이의 변이 디자인들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성에 관한 수조 가지의 변이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레고 도서관에서 정말 흥미로운 디자인은 극히 드물다. 정말이지 너무도 지루하고, 임의적이며, 영문 모를 디자인들도 정말 많다. 그리고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디자인들 또한 많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 세계의 중력에 직면했을 때 넘어지고 갈라지거나 무너져 내리는 그런 디자인들도 많다. 데닛의 용어를 빌리자면 당신이 레고 도서관에서 흥미를 가진 특정 디자인을 발견하기란 현실 세계의 대양에서 특정한 물 한 방울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다.
  • 그러나 당신이 특정한 디자인을 위해 레고 도서관을 찾아야 하는 정말 보람 없는 일을 떠맡았다고 생각해 보자. 지루하고 임의적인 디자인들로 가득 찬 우주보다 훨씬 더 넓은 바다에서 성, 우주선, 말 등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당신이 이리저리 도서관을 돌아다니다가 선반들을 엿보고 희미하게나마 흥미로운 디자인 한 개를 발견하는데만 수백 년이 걸릴지 모른다. 우리는 이 광활한 디자인 공간에서 신뢰할 수 있고 또 재빠르게 좋은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알고리즘을 필요로 한다. 진화가 바로 그런 알고르짐이다. 사실상 진화는 '그랜드 챔피언(grand champion)'이다.



진화의 구조

  • 모든 알고리즘은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구조를 필요로 한다. 알고리즘들은 정보를 처리한다. 따라서 우선 모든 가능한 레고 디자인들을 '정보'로 전환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우리가 레고 디자인을 코드화 하는 방법은 많다. 영어 문장을 사용하여 적을 수도 있다. 에컨대 'Attach a re 2by6 block on top of a blue 2by2 block' 이라는 식이다. 우리는 또 건축가가 청사진을 만드는 방식으로 디자인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또는 레고 디자인을 표시할 특정한 코드를 만들 수도 있다. 예컨대 'RED26TOPBLUE22AT56TO12' 라는 형태다. 또는 1과 0을 이용해 '101011100100101 등과 같이 컴퓨터 방식으로 레고 디자인을 표현할 수도 있다. 코딩이 정확히 어떤 형식으로 돼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디자인을 신뢰할 만한게 정확하게 코드화하고 또 풀어낼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돼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디자인 코드화를 '도식'이라고 한다. 일단 도식을 정립하고 나면 디자인 공간에 있는 임의의 모든 디자인은 이 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 그 다음에는 도식으로 표현된 정보를 저장한느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 레고 도서관의 경우 종이 노트 카드에 도식을 적음으로써 저장한다고 생각해 보자. 예컨대 어떤 카드는 'RED26TOPBLUE22AT56TO12' 또 다른 카드는 'YELLOW26TOPBLUE22AT56TO12'의 도식들을 적어 놓는 식이다.
  •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도식으로 표현된 이론적 디자인을 현실 세계에서 진짜 플라스틱 레고 건축물로 바꾸는 메커니즘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도식 식별자이다. 생물학적 세계에서 도식 식별자는 DNA를 생물로 바꾸는 메커니즘이다. 예컨대 새들의 경우 새끼에 대한 DNA 디자인을 실제 살아 있는 새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것은 수정란이다. 인간과 다른 포유동물의 도식 식별자는 여성 자궁 속 수정란이다. 데닛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주라기 공원> 이라는 소설과 영화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이것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룡을 재탄생 시키려면 과학자들은 공룡이라는 도식의 식별자, 다시 말해 암컷 공룡과 그 알을 필요로 했다는 얘기다.
  • 참고) 정보를 담은 코드와 그 코드를 기록할 저장소, 그 코드를 읽고 해석하여 실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컴파일러가 있어야 한다는 것
  • 생물학적 시스템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도식 코드가 그 자신의 고유한 도식 식별자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경우 여자 태아가 20주가 될 때면 이미 난소와 함께 그 안에 수백만 개의 알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출산을 하기 전에 자궁 안에 자기 자신의 딸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딸 안에 그녀의 미래 손자들을 위한 알도 갖고 있는 것이다.
  • 레고 장난감은 아직 스스로 복제하는 단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레고 도식 식별자는 해당 도식 코드를 알고 있는 일곱 살 어린이다. 이 어린이 앞에 레고 블록들이 담겨 있는 큰 박스를 던져 주고 이를 디자인 하기 위한 코드를 담은 카드를 이 어린 친구에게 넘긴다고 하자. 이 어린이는 충실하게 필요한 플라스틱 부분들을 다 꺼내 놓고 선 종이에 적혀 있는 코드대로 이들을 조립해 디자인을 만들어 간다. 우리는 이 어린이를 '식별자(reader)'라고 부를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식별자가 하는 일을 표현할 적절한 용어가 필요하다. 즉, 디자인 공간에 있는 이론적이고 잠재적인 그런 디자인과 실제로 만들어진 살아 있는 디자인을 구별할 용어가 필요하다. 우리는 진화 철학자 데이비드 헐로부터 그 용어를 빌리겠다. 바로 '상호작용자(interactor)'이다. 상호작용자는 디자인 공간에서 만들어져 어떤 환경에서 실재화된 디자인을 말한다. 어떤 진화 시스템에서 일단 한 디자인이 만들어져 실재화 되면 그것은 환경과 상호 작용하면서 선택의 압력에 직면하기 때문에 상호 작용자는 적절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 한편 진화의 구조에서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적합도 함수(fitness function)'다. 지금까지 레고 도서관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저자는 단지 흥미로운 디자인을 찾고 있다고만 말했다. 누구에게, 무엇에 흥미롭다는 말인가? 칼 심스 모델에서 적합도 함수는 수영 속도를 의미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디자인은 목적을 나타낸다. 따라서 레고 장난감의 목적은 어린이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레고 디자인 적합도에 대한 중재자로서 역할을 할 두 번째 일곱살 어린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식별자는 다양한 도식에 따라 레고 장난감을 조립하고 이를 적합도를 결정하는 어린아이 --심판자라고 부르겠다-- 에게 넘긴다. 이 심판자는 자신에게 넘어온 여러 장난감들을 보고, 0(따분하다)에서 100(최고다)의 척도로 평가를 한다.



진화의 과정: 어린이들의 놀이

  • 진화가 작동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정보 처리 기구들이 갖추어지면 우리는 이 시스템을 가동할 필요가 있다. 레고 조각들이 식별자의 바닥에 쏟아져 있다고 생각하자. 우리는 레고 도서관에서 ㄷ자인의 도식이 적혀 있는 100개의 카드를 임의로 꺼내어 식별자에게 건넨다. 그는 카드에 적혀 있는 대로 충실히 장난감을 조립해 심판자 앞에 그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러면 이 심판자는 장난감을 따분한 것에서 멋있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척도를 이용해 평가한다. 이 장난감은 완전히 임의적인 구조물이기 때문에 평가 점수는 대부분 0이거나 0에 가깝다. 그러나 일부 장난감은 다른 장난감들에 비해 좀 더 흥미롭다는 이유로 약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심판자들이 이렇게 적합도 함수를 적용해 장난감을 평가하는 과정을 '선택'이라고 말한다.
  • 식별자는 최고로 높이 평가 받은 2개의 장난감을 선택해 이들의 디자인 변종을 시도한다. 그는 이들의 도식 카드를 꺼내 임의로 반을 뚝 잘라서 서로 바꾸어 끼운다. 그러면 새로운 변종은 가장 높이 평가를 받은 두 장난감 각각의 디자인 특성들을 갖게 된다. 진화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렇게 도식의 부분을 서로 바꾸는 것을 '(염색체의) 교차'라고 한다. 진화 알고리즘의 중요한 필요조건 중 하나는 어떤 디자인의 적합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평균적으로 보다 많은 변종들이 여기서 만들어질 것이란 점이다. 디자인의 적합도를 높게 만드는 특징들이 그 집단 내에서 '증폭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레고 모집단의 규모에는 제약 조건이 있다. 식별자가 장난감을 만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레고 조각들의 수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모집단 안에서 적합도가 높은 장난감의 특성들은 증폭시키고 적합도가 떨어지는 장난감의 특성들은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가은 규칙을 실행할 것이다. 즉, 최고로 적합도가 높은 20개의 디자인들은 '교차'하는 짝당 4개의 변종들을 갖게 된다. 그 다음 20개의 경우는 3개, 그 다음 20개는 2개, 그 다음 20개는 1개의 변종을 각각 갖게 되고, 가장 적합도가 낮은 20개의 디자인은 단 하나의 변종도 갖지 못한다. 적합도 점수가 같으면 동전을 던져서 결정을 한다. 처음 100개의 디자인을 가지고 우리는 전체 100개의 변종들 --40+30+20+10+0-- 을 만들 것이다.
  • 일단 변종들이 만들어지면 처음 100개는 파괴해서 그 부품들을 박스 안에 도로 집어 넣는다. 우리는 또 높은 점수를 받은 디자인이 박스에서 이용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부품들을 필요로 할 경웬느 가장 점수가 낮은 디자인을 분해해 필요한 부품을 제공한다는 규칙을 도입할 것이다. 레고 세계에서조차 유한한 자원 때문에 경쟁이 있다.
  • 마지막으로 우리는 식별자 어린이가 완벽하지 않다고 가정할 것이다. 때때로 진행 과정에서 실수가 벌어질 것이다. 한 카드에 있는 도식을 다른 카드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 실수를 할 수 있다. 예컨대 우연히 기호르 ㄹ변화시키거나 누락하고 또는 그전에 없던 기호를 추가할 수 있다. 이런 실수의 대부분은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간다. 즉, 어디에선가 한 부분의 색깔이 바뀌었다든가 특정한 블록 벽돌 부분의 방향이 좀 달라졌다든가 하는 경우들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임의의 실수 하나가 후속적으로 나오는 장난감의 적합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임의의 실수가 바로 '돌연변이'다.
  • 자, 이제 두 어린이가 수십 번 이 사이클을 따라간다고 하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칼 심스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처럼 처음에는 임의의 낮은 적합도의 디자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보게 될 것이다. 어린이들은 한동안 수많은 흥미 없는 디자인들로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한 두 디자인이 심판자의 눈에 띄게 될 것이고, 그 디자인은 변종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할 것이다. 곧 보다 적합도가 높고, 보다 흥미로운 디자인들이 나타난다. 장난감 집단 전체적으로 적합도가 올라가기 싲가한다. 그와 동시에 장난감들에서 공통된 특징들이 나타날 것이다. 심판자의 입맛을 충족 시키는 이른바 '좋은 기술들'이다. 예컨대 만약 심판자가 사람과 동물들의 이미지를 갖는 장난감들을 좋아한다면 사지와 얼굴을 가진 장난감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심판자가 노란색을 좋아한다면 전체적으로 놀아 색조가 많이 흐르는 장난감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복잡한 구조들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레고 인간, 레고 말, 레고 강아지 등 적합도를 결정하는 심판자의 기호에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나타날 것이다. 레고 도서관을 임의로 찾아 나설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합도가 높은 디자인에 대한 발견이 훨씬 빠르게 일어날 것이다.
  • 상호 작용자 집단에서 공통된 특징과 좋은 기술들이 출현하는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복잡한 디자인은 내내적으로 모듈적(modular)이다. 우리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시스템, 부분 시스템 그리고 요소들의 배열로 이루어져있다. 예컨대 심장 혈관 시스템에는 심장과 적혈구가 있고, 이는 다시 또 시스템과 부분 시스템으로 이어진다. 복잡한 인간 몸의 디자인은 자동차의 브레이크 시스템, 브레이크 그 자체, 그리고 개별 브레이크 패드와 똑같은 특징들을 갖고 있다. 복잡한 디자인은 모듈과 부분 모듈들이 계층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집합체로 볼 수 있다. 진화 시스템에서 이들 시스템, 부분 시스템, 요소들 각각은 도식에서 그에 상응하는 코드 정보들을 갖고 있다. 진화적인 건축을 위한 도식은 빌딩 블록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빌딩 블록들은 보다 높은 차원의 빌딩 블록으로 결합되고, 이는 다시 더 높은 차원의 빌딩 블록으로 결합된다. 
  • 생물학에서 DNA 도식을 구성하는 빌딩 블록은 바로 개별 유전자들이다. 이 개별 유전자들은 눈 색깔에서부터 유독성 암모니아를 요소로 바꾸는 화학적 사이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코드화한 것이다. 레고 사례에서 레고 사지와 노란색 등을 코드화하는 도식의 덩어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빌딩 블록이 상호 작용자의 적합도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시간이 갈수록 그 빌딩 블록은 집단 내에서 보다 확산된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암모니아를 분해하는 매우 유용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심판자가 노란색을 정말 좋아한다면 모든 도식들에서 노란 빌딩 블록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 실제로 도킨스가 지적했듯이 선택은 상호작용자 그 자체가 아니라 빌딩 블록에서 작용한다. 심판자는 어떤 특징을 선호하고 그 결과 진화 과정은 심판자 앞에 서로 다른 결합들을 매달아 놓고 어떤 특징이 심판자의 눈을 사로 잡는지 시험해 그런 특징을 가진 것들을 더 많이 채택한다. 시간이 흐르면 그런 특징들은 집단 내에서 보다 확산된다. 따라서 사실상 진화 과정은 개별적인 장난감을 선택하는게 아니다. 비유를 하자면 "심판자는 사지(limbs)가 있는 노란색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런 것이다.
  • 이제 그 심판자를 제거하고 다른 심판자로 바꾼다고 생각해 보자. 갑자기 레고 환경에서 적합도가 높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전 심판자의 기호를 충족 시켰던 많은 장난감들이 이제는 심판자 2에 의해 '따분한 것'으로 평가되는 적합도의 붕괴가 일어난다. 그러나 일정 시점이 되면 진화 알고리즘이 안착되면서 좀 더 나은 디자인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일단 이런 일이 일어나면 더 쫗은 디자인의 변종들이 점점 더 많이 생겨나고, 결국 레고 장난감 집단들의 적합도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다. 만약 심판자 2가 비행기, 자동차, 녹색을 좋아한다면 날개, 바퀴, 녹색을 많이 가진 그런 디자인들이 출현하기 싲가할 것이다.
  • 진화는 가능한 모든 가능성의 공간에서 시작한느 변화의 과정이다. 많은 디자인들을 시험해 보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고, 그중 좋은 것은 더 많이 채택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버리느 ㄴ일을 반복한다. 여기에는 어떤 예측, 계획, 합리성, 그리고 의도적인 디자인 같은 것들은 없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알고리즘만 있을 뿐이다.



복제자는 복제를 원한다

  • 내생적인 진화의 논리 또는 외부의 디자이너다 프로그래머의 도움을 받지 않는 그런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구 상에서 생물의 발전을 살펴 보는 것이다. 지구는 대략 46억 년 정도 되었다. 처음 수십억 년 동안은 어떤 종류의 생물도 없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냉각수 같은 대양에서는 여기저기 허우적대는 초기 지구의 풍부한 화학적 작용이 있었다. 격랑이 일면서 땅덩어리가 만들어졌고, 화산 등 대기권으로의 분출도 일어났다. 천문학적으로 많은 수의 분자들이 열을 받고, 냉각되고, 이리저리 튀겨지고, 전기적으로 충전되면서 상호 작용을 하고 서로 반응 했다. 이를 통해 점점 더 복잡한 분자들이 생성 되었다.
  • 이런 과정을 거쳐 30 ~ 35억 년 전에 이르러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분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맨 처음 복제하는 분자의 수준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본뜨기 형판, 즉 주형을 넘는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자기 복제 분자가 아마도 주변의 다른 화학 물질 집단에서 정반대 분자들을 끌어들이고, 이들이 다시 자신들과 정반대인 분자들을 끌어들이면서 초기 분자의 복제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마치 네거티브 사진을 찍어 프린트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간단한 자기 복제 분자조차 우연히 일어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러나 조의 조의 한 번은 정말 작은 확률이지만 수조의 조의 분자들이 약 10억 년에 걸쳐 1000의 6제곱의 제곱만큼의 상호 작용ㅇ르 하는 경우라면 충분히 일어날 만하다. 어떤 과학자들은 또한 그 가능성이 열역학 법칙적으로 크게 높아졌다고 믿는다. 초기 지구는 화산과 다른 여러 가지 지열 활동, 그리고 신진 대사의 기초인 반응 네트워크과 복잡한 유기 분자들로 인해 엄청난 양의 자유 에너지를 가졌다. 따라서 자기 복제는 이 모든 에너지가 대양의 화학 작용을 통하여 퍼져 나가는 자연스럽고도 가능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 과학자들은 처음으로 자기 복제를 한 분자 --또는 분자들-- 의 정확한 구성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이것이 여전히 중요 연구 영역이 되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최소한 하나의 분자는 RNA의 전조와 같은 것이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지구 상의 모든 생물들은 리보솜 RNA 상의 공통된 유전자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단 초기 지구에서 이리저리 튀기는 임의의 화학작용으로부터 첫 복제 분자가 발생했다면 하나의 특이한 논리가 일어난 것이다. 
  •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지적한 대로 어떤 복제 과정도 완벽하지 않다. 결국 오류가 끼어들고 이로인해 여기저기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자기 복제 분자는 원래와 거의 비슷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은 것을 만들어 낸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가 자기 복제 과정에서 크게 손상될 정도로 그렇게 충분히 큰 게 아니라고 생각해 보자. 시간이 좀 지난 뒤에는 화학 물질들의 집단은 조금씩 서로 다른 다양한 자기 복제 분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 화학 물질 집단 내에 있는 다양한 자기 복제 물질들은 똑같다고 봐야 할 것인가? 도킨스도 동의하듯이 불가피하게도 그렇지 않다. 어떤 분자들은 다른 분자들에 비해 화학적으로 좀 더 안정적일 것이고, 그 결과 이 분자들은 더 오래 살아남거나 자기 복제에 더 빠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더 좋고 더 빠른 자기 복제자들이 집단 내에서 더욱 퍼지게 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자기 복제를 하는 분자들의 이웃에서 이들의 복제에 쓰이게 될 유한한 원료들이 공급된다. 임의의 변화가 발생해 어떤 분자가 다른 분자에 비해 화학적으로 이런 원료를 끌어들이는데 더 능숙하게 된다면 그 분자는 보다 많은 자기 복제를 하게 될 것이다. 유한한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은 맨 처음부터 진화의 테마였다.
  • 결국, 어떤 분자들은 다른 동료 자기 복제자들의 구조를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분해하는 화학적 구조를 우연히 갖추게 되고 이로 인해 공격하는 분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희생물이 된 분자들을 편입할 수 있다. 이런 우연한 혁신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준다. 혼자서 원료를 발견하고 조립하는 것보다 동료 복제자들로부터 미리 조립된 원료를 취하는게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붕괴에 취약하고 자신의 화학 물질을 도둑 맞은 분자들은 집단 내에서 급격히 쇠퇴하는 반면 훌륭한 파괴자들은 재빠르게 자기 복제를 해낼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일부 자기 복제 분자들의 경우 자신들의 자기 복제 장치와 외부 세계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하는 화학 물질, 예컨대 지질을 외층부에 우연히 갖게 될지 모른다. 파괴자들을 대비해 방어 장치를 가진 분자들은 성공적으로 보다 빈번하게 자기 복제를 할 것이고, 그만큼 집단 내에서 확산된다. 일단 밖의 세계에 대비한 장벽을 갖추고 복제하는 단계에 도달하면 지금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 잡히는 어떤 특별한 무엇이 있다. 바로 바이러스다. 어떤 바이러스는 지금 살아 있다고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 분자들의 전쟁 밑바닥에 흐르는 논리는 매우 간단하다. 좋은 복제자들이 복제된다는 점이다. 동의어의 반복처럼 들리지만 단순하고 순환적인 논리는 가장 미묘하면서도 강력한 진화의 동인이다. 우연히 복제 능력에 어떤 격차가 발생하면 복제를 촉진시키는 요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집단 내에서 더욱 보편화 될 것이다. 진화는 궁극적으로 복제를 지원하는 빌딩 블록 들을 선택한다. 이것이 도킨스의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핵심이다. 여기서 이기적이라는 의미는 때때로 잘못 이해되기도 하는데, 도킨스는 유전자가 우리 --또는 다른 생물들-- 를 생존 탐색과 관련하여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게 만든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많은 종들에게 협력은 실제로 중요한 생존 수단이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복제의 논리였다. 자신의 복제를 지원하는데 능한 유전자들이 복제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좋은 복제자들이 복제된다'는 논리는 때때로 우리의 컴퓨터를 망쳐 놓는 바이러스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 어떤 성공적인 컴퓨터 바이러스는 자신을 많이 복제하는 바이러스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수신자의 이메일 주소록을 이용해 자신을 복제한다. 따라서 바이러스가 복제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착할 때 수신자로 하여금 이메일을 열어 보도록 속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에서부터 'OOO의 누드 사진'에 이르는 제목들을 단 이메일로 날아온다. 최근에 저자가 받은 이메일은 보낸 사람이 '관리자'이고 제목은 '당신의 이메일 계정이 폐쇄된다'는 제목을 단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해커들이 자신들의 만든 바이러스가 복제되도록 하기 위한 기술들이다. 복제되기 좋은 바이러스들이 복제 되기 때문에 전 세계 컴퓨터 바이러스 집단을 조사해 본다면 특히 잘 속이는 바이러스들이 그중에서도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이렇게 해서 약 38억 년 전 자기 복제 분자 전쟁은 훌륭한 복제자들이 오늘날 RNA와 비슷한 자기 복제 과정, 그리고 분자들과 외부 세계 사이의 기초적인 막을 갖는 정도로 진전됐다. 그러나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세포핵 또는 보다 고등 유기체 세포에서 발견되는 다른 세포 기관 등은 갖추지 못한 그런 수준이었다. 이들 첫 생물 형태는 봉지 안에서 자기 복제를 하는, 예컨대 바다에서 거품이 인 매트 모양으로 떠다니는 간단한 남조식물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일단 자기 복제 분자가 이정도에 이르면 진화는 경주를 향해 출발한 것이나 다름 없다. 보다 복잡한 내부 조직을 갖추고, 이동하고 햇빛을 처리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수많은 단세포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8억 년 전에 이르면 진화는 다세포 생물 형태라는 디자인을 발견한다. 이것이 식물, 동물,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다양성의 폭발을 가져온 것이다.
  • 이 생물 진화 이야기에는 물론 추가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과학적 세부 사항들이 많이 있지만 그 논리는 어떠한 외부적 요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식과 도식의 식별자, 그리고 적합도 함수가 있으면 바로 진화의 논리는 정립될 수 있다. 생명 이야기에서 도식과 도식 식별자는 똑같은 하나다. 자기 복제 분자들이 코드이면서 동시에 식별자인 것과 같다. 복제를 위한 기술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를 해왔다. 이 과정을 거쳐 DNA와 DNA를 보호하는 핵막, 성적 재생, 그리고 상대방 성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많은 전략들과 같은 혁신들을 만들어 냈다.
  • 레고 실험에서 적합도 함수는 심판자에 의해 외생적으로 주어졌다. 생물학에서 적합도 함수는 내생적이다. 적합도를 결정하는 어떤 제약 조건은 고정적이다. 예컨대 물리나 화학 법칙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적합도 함수의 다른 중요한 측면들은 시스템과 더불어 공진화를 한다. 하나의 유기체를 둘러싼 환경 중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은 다른 유기체들이다. 각 유기체의 진화를 향한 움직임과 그 반대의 움직임은 다른 유기체들의 적합도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약탈자라면 매우 빠른 스피드 쪽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먹잇감은위장술을 발전 시킬 것이고, 이에 따라 약탈자의 시력은 보다 향상될 것이다. 이런 식의 맞물려 진화하는 일종의 군비 확장 경쟁이 끝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각 움직임마다 적합도 함수가 변한다. 적합도의 또 다른 요소인 지구의 기후조차 생물이 진화하면서 변해 왔다. 예컨대 식물의 발전은 대기권에 산소량을 증가시켰다. 이는 산소를 들이마시는 생물들을 위한 길을 만든 효과를 가져왔다. 물론 지금은 인간의 진화가 기후는 물론이고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생물들의 적합도 함수를 더욱 바꿔 놓고 있다.
  • 진화를 위한 준비는 결국 정보 처리로 귀결된다. 진화가 발판을 마련하려면 정보를 처리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이는 도식을 저장하고 수정하고 복사하기 위한 것이다. 생물 세계에서 진화가 출발하려면 열역학과 우연히 결합돼 분자 디자인을 저장하고, 수정하고, 복제할 수 이는 첫 자기 복제 분자가 만들어져야 가능하다. 제 3부에서 경제 세계에서는 진화에 발판을 마련해 주는 정보 처리 매개체가 말과 문서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정보 처리 매개체가 정립되면 차별화, 선택, 그리고 복제의 과정이 시작될 수 있다. 좋은 복제자가 복제되고, 무엇이 적합한지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데, 여기에는 다른 복제자들과의 경쟁이 포함된다. 그렇게 진화는 보다 더 좋은 복제자 디자인을 추구하면서 디자인 공간을 향해 행진을 시작한다.



적합도 지형 탐색

  • DNA로 코드화할 수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디자인 공간을 생각해 보자. DNA 알파벳은 4문자, C, G, A, T다 이들 4개의 뉴클레오티드 염기는 시토신, 구아닌, 아데닌, 티민이다. 각각 염기쌍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들은 다시 우리가 익숙한 이중 나선형 DNA로 되어 있다. 인간 게놈은 약 60억 개의 DNA 염기쌍을 갖고 있다. 인간보다 더 긴 DNA 가닥을 가진 생명체의 진화를 생각해 보기위해 염기쌍이 100억 개가 넘는 DNA 알파벳의 모든 가능한 서열을 담고 있는 그런 디자인 공간을 상상해 보자. 나아가 두꺼운 책에다 각각의 서열을 적어 책상 위에 쌓는다고 해보자. 당연히 우주의 규모보다도 훨씬 더 클 것이다. 책상 위 어디엔가 당신의 전체 DNA 서열을 담은 3천 페이지짜리 책 한 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대장균 서열 관련 책 약 1만 900권, 식물 종들 관련 책 1012,000 등 너무도 많은 책들이 있다. 대니얼 데닛은 가능한 모든 DNA 생명체들의 디자인 공간을 가리켜 맨 처음 유전자를 발견한 19세기 수도사의 이름을 따서 '멘델의 도서관' 이라고 부른다. 레고 도서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있는 것들 중 대부분은 시시한 것들이다.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처음부터 실패작인 돌연변이체를 생산하는, 한마디로 유전자로서는 별 볼일 없다는 얘기다.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살아남을 수 있는 디자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보다 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대한 디자인 공간의 규모와 비교해 보면 극히 드물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레고 도서관에서와 마찬가지로 멘델 도서관도 유한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특정 시점에서 유한하다. 사실 지구에서 생물의 역사를 보면 단순한 박테리아에서부터 보다 복잡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흐름에 따라 DNA 가닥의 길이가 확장돼 왔다. 이는 곧 DNA 디자인 공간 규모의 확장이다. 디자인 공간을 풍선의 표면과 비슷한 것으로 새각해 볼 수 있다. 특정 시점에서는 유한하지만 공기 등이 들어가면서 표면이 팽창하듯이 이것도 늘어난다. 멘델 도서관과 같은 디자인 공간의 유한성은 수학적으로는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실제적인 목적 측면에서 보면 무한한 것과 비슷하다. 인간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모든 가능한 디자인들에 대한 완전한 탐색은 수많은 우주들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 데닛으로부터 또 하나의 이미지를 차용하자. 멘델 도서관에 있는 각 DNA 책은 그 위에 탑처럼 금속 막대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상상하자. 우리는 각 막대기의 높이가 그 밑에 있는 특정 DNA 서열의 적합도를 나타내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까 높을수록 디자인의 적합도가 좋은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적합'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특정 시점에서 특정 환경에 대한 적합을 의미한다. 추가적인 가정을 하나 더 하겠다. 멘델 도서관에 있는 DNA 책들은 한 비트씩 떨어진 순서로 배열되었다고 하자. 가령 AGCCT 서열은 CGCCT 옆에 있고, CGCCT는 GGCCT 옆에 위치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DNA를 담고 있는 책 바로 옆에는 단지 글자 하나만 차이나는 무려 360억 가지 변종들이 있다. 우리는 한 번에 한 글자씩 움직여 책에서 책으로 이동하면서 각 DNA 서열에 대해 막대 높이로 표시되는 적합도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 위 그림의 서로 다른 막대 높이를 가진 산 같은 경관을 보자. 어떤 디자인이 다른 다자인보다 더 좋은지 알 수 있도록 디자인 공간을 표현하는 방법을 생물학자들은 '적합도 지형 --경관-- ' 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진화 이론가인 시월 라이트가 1931년 처음 개발한 개념이다. 적합도 지형은 디자인 공간에서 좋은 디자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연구자들에게는 수학적으로-- 보여준다. 좋은 디자인은 높은 적합도 정점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디자인 공간에서 좋은 디자인을 발견하는 문제는 적합도 지형에서 높은 정점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 적합도 막대로 구성된 이 거대한 산더미 같은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스튜어트 카우프만은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모든 막대들이 서로 다른 높이를 갖는 경우다. 이때 그 지형은 완전히 임의적이고, 뾰족한 막대들이 무질서하게 뒤범벅된 그런 모양새일 것이다. <그림 9-4> 또 하나의 극단적인 경우로 완전히 질서 잡힌 지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낮은 적합도에서 높은 적합도로 점진적으로 발전, 탑처럼 올라가면서 후지 산 같은 단일 정점을 가진 모양새다. <그림 9-5>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중간 어디쯤에 해당한다는 것이 카우프만의 주장이다. <그림 9-6>
  • 그러나 당신의 DNA 책과 단지 글자 하나가 다른 DNA 책은 십중팔구 --그것이 특별히 운지 옿은 혹은 운이 나쁜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당신의 것과 똑같은 적합도를 가질 것이다. 두 글자가 다른 DNA 책 또한 동일한 적합도를 가질 것이다.그러나 당신의 DNA 책에서 점점 멀어져 수십 자, 수백 자 또는 수천 자가 다른 DNA 책으로 이동하면 이런 변하ㅗ가 적합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올라가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질수록 그 책의 접합도 또한 다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런 변화들이 거리에 따라서 고르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조그만 변화가 큰 효과를 가질 수도 있고, 큰 변화임에도 반대로 조그만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이웃 DNA 간의 적합도는 단지 개략적으로만 상호 연관되어 있는 셈이다. 책들 사이의 거리가 보다 떨어지도록 이동하면 적합도 변화는 울퉁불퉁한 모양새가 된다. 카우프만이 발견한 것은 이런 적합도 지형에서 개략적인 상관관계의 효과는 임의적으로 뒤범벅된 형태 또는 하나의 정점을 가진 후지산 모양 보다는 스위스 알프스 산과 비슷한 지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산타페 연구소의 짐 크러치필드 등 다른 연구자들은 적합도 지형의 수학적 형상을 연구해 추가적인 특징을 밝혀냈다. 먼저 정상적인 산의 지형과 달리 적합도 지형은 평탄한 지역들로 둘러싸여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유기체 DNA 코드 상의 수많은 조그만 변화들은 그것이 적합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따라서 당신의 DNA와 한 자가 다른 360억 개의 변종들, 그리고 몇 글자 다르지 않은 수조의 수조의 변종들로 이루어진 지형은 크고 평탄한 모양새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탄한 고원 내부에는 깊은 구멍 또는 무시무시한 크레바스들이 있다. 마치 스위스 치즈의 얽은 자국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런 구멍에 빠지면 적합도는 크게 떨어진다. 수많은 조그만 돌연변이들이 거의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중에는 꽤 위험한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뇌 기능에서 중요한 단백질을 만드는 그런 지시가 당신의 DNA에 빠져 있다면 당신은 큰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매우 부정적인 돌연변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매우 긍정적인 조그만 돌연변이도 있다. 그런 긍정적인 조그만 돌연변이들은 적합도의 괄목할만한 향상을 가져오거나, 때때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적합도 향상을 위한 돌연변이'가 추가적으로 나올 길을 열어 놓을 수 있다.크러치필드는 적합도 지형에서 이를 '관문들(potals)'이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마치 산에 있는 한 고원에서 다른 고원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산으로 올라가는 빠른 경로들이다. 앞 장에서 우리는 생태계에 있는 수많은 종들의 관계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구조를 논하면서 단속 균형을 설명하는 모델을 살펴보았다. 크러치필드에 따르면 평평한 지역, 스위스 치즈의 구멍, 그리고 관문 등 적합도 지형의 특징들은 유전 변화의 영향과 관련하여 비선형성을 갖게 함으로써 단속 균형에도 기여한다. 대부분의 변화들은 거의 또는 아무 영향이 없지만 어떤 변화는 적합도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다양한 종들의 관계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에 큰 영향을 미친다.
  • 도식 상에 조그만 변화를 나타내는 대부분은 적합도에 미치는 영향이 작거나 거의 없지만 그중의 일부가 큰 영향을 미치는 디자인 공간은 그림에서 본 바와 같이 개략적으로 상호 연관된 모양의 그런 생물학적 적합도 지형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다. 바로 그런 특징이 진화를 적합도 지형을 탐색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알고리즘으로 만든다.



탐색 알고리즘의 그랜드 챔피언

  • 높은 정점을 향해 멘델의 산 같은 적합도 지형을 탐색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과제는 가장 높은 정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단일의, 또 명확하게 가장 높은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똑같은 높이의 여러 개 정점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모든 막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적합도 막대가 하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발견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점이다. 게다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정점의 높이도 계속 변한다. 그래서 막상 가장 높은 막대를 발견했을 때는 그것이 이미 낮아졌거나, 또 다른 막대가 더 높아졌을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어떤 '글로벌 최적점'을 탐색한다기 보다는 주어진 시점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점들을 찾는 것이 과제다.
  • 도보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탐색과 관련하여 세 가지 추가적인 조건들을 소개하겠다. 먼저, 칠흑 같은,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방랑이 당신을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는지, 아니면 더 낮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어떤 의미에서도 진화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진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해 보는 것뿐이다.
  • 둘때, 이런 산 같은 적합도 지형은 상당히 위험한 특징을 갖고 있다. 카우프만은 지형에서 적합도가 낮은 계곡이나 갈라진 틈에 붙어 있는 유독성 안개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만약 당신이 헤매다가 너무 낮은 곳으로 가면 안개 속으로 내려가 질식해 숨지고 말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안개는 자연 선택을 나타낸다.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당신의 적합도가 너무 낮으면 당신은 솎아져 나올 것이다.
  • 셋째, 적합도 지형은 정태적이지 않다.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한다. 환경이 변하면 적합도 함수도 변하고, 이에 따라 오늘은 적합도가 높은 정점인 곳이 내일은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환경이 변하면 지형도 움직이고 기복이 생겨난다. 적합도가 떨어지는 계곡들이 갑자기 밀고 나와 새로운 산이 되고, 반면 그전에 높은 정점이었던 곳은 낮은 곳으로 내려앉아 유독성 안개 밑에 위치하는 식이다. 주어진 특정 시점에서 지형의 어떤 지역은 안정적이고, 다른 지역은 텍토닉 플레이트처럼 점진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 반면 또 다른 지역들은 매우 활발해, 극적인 융기, 지진, 분화 등으로 가득 찬 단층성과 같은 것들일 수 있다.
  • 소행성의 지구 충돌과 이로 인한 기후 변화처럼 적합도 지형의 일부 변화는 환경에 대한 임의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그러나 움직이고 솟아나는 일의 대부분은 종 자체의 진화 결과다. 앞서 모든 종은 다른 종들과의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즉, 약탈자, 먹잇감, 공생, 기생 등이 관계들이다. 종들은 공진화를 하면서 공격과 방어, 협력과 경쟁 간 일종의 군비 확장 경주를 벌인다. 그 결과 어느 한 종의 진화적 변화는 다른 종들의 적합도에 연쇄적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



  • 지형을 탐색하기 위하여 먼저 임의의 한 출발점을 선택한 뒤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규칙을 따른다. 임의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래서 더 올라간 것이면 다시 임의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전 위치로 돌아와 다시 시도한다. 만약 출발점이 계곡 아래쪽이고 이 규칙을 따른다면 처음에는 계곡 바닥에서 이리저리 헤맬 것이다. 그러나 결국 위로 올라가는 경로를 발견할 것이고 꽤 빠르게 가장 가까운 정점으로 기어오를 것이다. 이런 규칙을 '적응적 보행'이라고 부른다. 적응적 보행은 개별적인 정점으로 올라가는데는 효율적이지만 한계가 있다. 일단 정점의 꼭대기에 이르면 거기서 멈추어 국지적인 어떤 최고점에 박혀 버린다. 더 높은 정점이 그 계곡 건너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을 결코 찾아내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가려면 다시 처음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적응적 보행 모델은 에베레스트 산들로 이루어진 지역의 중간에 있는 한 흙 두둑 위에 멈춰 버리고 마는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다.



  • 이제 또 다른 전략을 가지고 임의의 출발점을 선택하자. 이번에는 보행이 아니라 매우 강력한 스카이 콩콩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버튼을 누르면 임의의 거리, 임의의 방향으로 옮겨 갈 수 있다. 높은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당신은 버튼을 계속 누른다. 이 전략은 '랜덤 점프(random jump)'로 불린다.
  • 랜덤 점프는 적응적 보행 모델과 비교하여 국지적인 최고점들에 바히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다. 즉, 낮은 정점에서 보다 높은 정점을 향해 중간에 있는 계곡들을 넘어 계속 뜀박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불리한 점이 있다. 즉, 어떤 죽음의 계곡 밑에 당신이 놓여있다는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 적응적 보행 전략의 경우는 최소한 당신을 가장 낮은 지역에서 빠져 나오게 하고 유독성 안개를 피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랜덤 점프는 적응적 보행 전략에 비해 좀 위험한 전략이다. 랜덤 점프는 또 실제로 높은 정점을 발견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원뿔 형태로 된 산의 기하학을 생각해 보자. 원뿔을 놓고 수평으로 반을 뚝 자르면 원뿔 밑의 반 표면은 위의 반 표면 보다 항상 더 클 것이다. 지형의 보다 큰 표면적은 높은 적합도보다 낮은 적합도를 갖는 영역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평균적으로 볼 때 랜덤 콩콩 점프를 하면 적응도가 낮은 곳에 당신이 위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운 좋게도 가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가능성 측면에서는 그렇다. 적합도 지형을 탐색하다가 적당히 높은 적합도를 가진 지역을 찾아낸 그 누구에게도 지금보다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질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이 항상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점을 다시 한 번 상기 하는 것이 좋겠다. 어떤 디자인 공간에서 좋은 디자인의 수는 데닛의 표현을 빌리자면 '0에 가까울 정도로 적다'
  • 이제 우리는 골라 잡을 수 없는 이른바 홉슨의 선택(Hobson's Choice)에 직면한 것 같다. 위험도는 낮지만 매우 높은 정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작은 전략을 택하든지, 아니면 높은 정점에 도달할 가능성은 있지만 잘못하면 유독성 안개 밑으로 내려갈 수도 있는 위험도가 큰 전략을 택하든지 해야 한다.



  • 이제 다음으로 두 가지 선택을 혼합한 알고리즘을 시도해 보자. 적응적 보행을 함으로써 지형에서 계속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만 또한 국지적 최고점에 박혀 버리지 않도록 몇 번의 랜덤 점프도 하는 알고리즘이다. 그리고 보다 짧은 점프 쪽에 가중치를 줄 것이다. 이는 국지적 최고점에서 멈추는 일을 막는데 도움이 되면서도 정말 낮은 계곡에서 종말을 맞을 가능성을 줄여 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변화를 추가한다. 단 한명이 아니라 적합도 지형을 탐색하는 일단의 보행자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모델은 어떻게 작동할까?
  • 만약 우리가 카우프만의 표현을 비렬 이른바 '신의 눈'으로 보면 각 보행자들은 거대한 영역 위에 하나의 조그만 검은 점이고 이들이 보다 높은 정점을 찾아다님에 따라 우리의 군대는 와글거리는 구름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참가자들이 적응적 보행을 취함에 따라 구름은 산 위쪽으로 서서히 움직인다. 결국 구름은 국지적 고원에 이르게 되고 참가자들은 더 높은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구름 또한 그 주변으로 퍼질 것이다. 적응적 보행을 계속함에 따라 일부 참가자들은 스위스 치즈의 구멍으로 빠져 사라지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국지적 고원 주변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때떄로 이 그룹에서 랜덤 점프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주력 부대에서 멀리 떨어져서 나아간다. 마치 선발대처럼 이들 랜덤 점퍼들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경로들을 찾아 나선다. 일부 점퍼들은 고원 경계 밖으로 벗어나 유독성 안개 밑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또 다른 점퍼들은 우연히도 더 높이 올라가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지 모른다. 적합도가 낮은 계곡에서 더 높은 새로운 계곡으로 가는, 크러치필드가 말한 '관문'이 되는 다리들 중 하나를 발견할지 모른다.
  • 우리는 양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을 취한다. 하이킹 참가자의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적응적 보행 쪼긍로 할당돼 지형을 탐색해 간다. 그러나 군데군데서 베팅도 한다. 일부 참가자들은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채 흩어져서 수색하고 그중 몇몇은 정말 멀리 떨어져 탐색한다. 이러한 전략은 불가피하게 일부 참가자들의 손실도 가져오지만 국지적 고원에 박히지 않고 보다 높은 적합도 지역을 발견할 가능성을 높여 줄 것이다.
  • 이렇게 한 집단 전체에 걸쳐 군데군데 베팅을 하는 것은 정확히 진화가 하는 일이다. 각 상호 작용자 또는 생물에서의 유기체는 하나의 보행자도 볼 수 있다. 복제 과정은 적응적 보행에 에너지를 준다. 만약 높은 적합도를 보이는 보행자가 다른 높은 적합도를 가진 보행자와 그 도식들을 다시 결합하고 그 결과 낮은 적합도를 가진 보행자들보다 더 많은 자손들을 가지는 경향을 보인다면, 보행자들의 구름은 보다 높은 고도에서는 커지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차별화 과정은 --생물에서는 염색체의 교차와 돌연변이를 통하여-- 지형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보행자들이 있다는 의미다. 물론 대부분은 같은 지역에 서로 가까이 모여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보행자들이 어쨌든 살아 있다면 최소한 유독성 안개 위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기 보다는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언제나 더 많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최소한 일부는 멀리 떨어져서 더 높은 입지에 이르는 길을 찾을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 만약 멀리 위치한 첨병들이 어떤 새로운 길을 찾아낸다면, 가령 새로운 높은 적합도 지역으로 가는 관문이 되는 육교를 건너간다면, 이들은 빠르게 재생하여 그 지역에서 새로운 구름 집단을 만들 것이다. '신의 눈'으로 보면 어떤 다른 고원 위에서 와글거리는 구름 집단이 보일 것이다. 이 와글거리는 구름 집단은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종이다.
  • 차별화를 통한 베팅은 적합도가 높은 지역을 향해 새로운 길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지형이 변하더라도 일부 보행자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다. 보행자 집단의 대부분은 갑자기 지형이 바뀌고 그로 인해 고원이 안개 아래로 붕괴될 순간에도 괜찮은 적합도를 갖는 고원에서 생을 즐기면서 와글와글하고 있을지 모른다. 갑작스러운 변화 후 살아남은 보행자들은 멀리 떨어져서 집단을 재생해야 하는 첨병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낮은 적합도 지역에 있던 첨병들은 지형이 변함에 따라 자신들이 새롭고 보다 높은 고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유전자적 다양성이 집단에서 갖는 중요한 역할이다. 적합도 지형 전역으로 사전에 베팅을 해놓지 않으면 갑자기 환경이 변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 진화는 점프를 만들어 냄으로써 존 홀란드가 말하는 탐색과 활용 간의 긴장을 관리한다. 진화가 보다 높은 고원을 발견하면 그 집단 구성원의 대부분은 그 지역 주변에 모여들어 재생을 하며 성장한다. 복을 활용하고 자신들이 발견한 이 성공적인 적응을 십분 이용한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언덕을 올라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 이른바 '과도한 적응'을 예방하는 도보 여행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 흥미롭게도 진화는 탐색과 활용 간의 적절한 균형을 자동적으로 맞춘다는 점을 홀란드는 보여 주었다. 상황이 좋으면, 높은 고원을 발견했다면 그런 환경에 맞추어 진화는 집단의 보다 많은 자원을 이에 대한 활용 쪽에 투입한다. 그러나 상황이 나쁘면, 집단이 계곡 밑에 위치해 있으면 보다 많은 탐색 쪽으로 향한다. 진화가 적합도 지형의 새로운 부분을 점유할 때면 언제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 대한 베팅을 할당한다. 그러나 보다 많은 정보를 얻게 되면 여느 다른 베팅자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유망해 보이는 베팅에 자원을 증강하고 싶어 한다. 홀란드는 활용과 탐색 간 균형을 위한 최적의 공식을 만들어 냈고 진화는 최적 균형을 달성하는데 매우 근접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진화는 하나의 도박꾼이지만 가능성을 매우 잘 활용하는 그런 도박꾼이다.



좋은 기술, 강요된 움직임, 그리고 경로 의존성

  • 데닛의 이른바 '좋은 기술'은 소멸의 고통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매력적이어서 진화적 탐색이 반복적으로, 독립적으로 찾아낼 가능성이 높은 그런 조치들이다. 예컨대 적합도 지형에서 '눈을 가진 생물들'로 불리는 크고 높은 산 지역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여기에 있는 모든 생물들의 DNA 책은 빛을 탐지하는 센서를 만들라는 지시를 담고 있다. 눈을 통해 빛을 탐지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사실상 환경에 관계없이 적합도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적합도 지형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거주하는 곳은 높은 적합도를 가진 매우 크고 안정적인 지역이다. 이 지여의 규모, 높이 그리고 안정성을 보아 진화적 탐색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크고 높은 산 지역들은 또한 여기에 이르는 다수의 진화 경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좋은 기술은 여러 종들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할 것이고 그 종들은 포유류의 눈 디자인, 곤충의 눈 디자인처럼 어느 정도 서로 다른 디자인을 가질 것이다.
  • 데닛은 또 다른 요소도 설명하고 있다. '강요된 움직임(Forced Moves)'이다. 체스에서 선수들은 때때로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어떤 다른 움직임도 자살적 행위가 되는 그런 상황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적합도 지형에서 진화 탐색 움직임은 어떤 주어진 환경에서 이미 적합한 것들로 인해 제약을 받는다. 즉, 적합도가 낮은 유독성 안개 위에 있는 산등성이를 따라 달려가는데, 여기서 벗어나면 죽음이 되는 경우다. 강요된 움직임은 물리학이나 화학 법칙들에 의해 부과된 제약 조건들로 인해 만들어진다. 예컨대 열역학 법칙이 그렇다. 이 법칙은 모든 생물체들은 자신들과 외부 세계 사이에서 낮은 엔트로피의 내부와 높은 엔트로피의 외부 간 장벽으로 작용할 일종의 경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생명체는 피부, 막, 외골격, 프로테인 셸, 또는 다른 용기와 같은 것들을 가진다. 현재의 환경 상태로 정의되거나 종들 간의 공진화로 정의되는 다른 여러 가지 강요된 움직임들은 영원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 적합도 지형도의 마지막 결론은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던 '경로 의존성' 이다. 진화 시스템에서는 역사가 중요하다. 당신이 앞으로 갈 길은 당신이 과거에 왔던 길에 의존한다. 차별화는 집단들을 적합도 지형 주변으로 흩어지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랜덤 점프는 임의적이면서 동시에 보다 작은 점프 쪽에 가중치를 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어떤 정점을 어류와 같은 디자인들이 점유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어류들의 환경은 계속 변한다. 생태적 지위가 사라지면서 그 정점은 유독성 안개 속으로 빠지고 있다. 그러나 신의 눈 관점에서 보면 근처에는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또 다른 형태의 어류 디자인을 위한 정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유독성 안개 위에 있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디자인 사이에 어떠한 경로도, 육교도 없다. 랜덤 점프로 이어지기에는 두 디자인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첫 번째 어류 디자인과 두 번째 어류 디자인 사이를 이어주는 지속 가능한 중간적 생태 지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류는 자신이 가진 '역사의 포로'가 되고 만다. 특별한 정점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특별한 경로, 그리고 미래를 위한 선택 방안들은 그 과거에 의해 제한 받는다.
  • 수학자들과 진화 이론가들은 여러 가지 다른 지형도에 관하여 다양한 종류의 대안적인 탐색 알고리즘을 탐구해 왔다. 어떤 알고리즘은 완전히 임의적인 지형들을 탐색하는데 더 좋고, 어떤 알고리즘은 고도로 질서가 잡히거나 규칙적인 지형을 탐색하는데 더 좋다. 그러나 그 중간에 있는, 개략적으로 상호 연관된 수준이고 고원, 구멍 관문 등과 같은 복잡한 특징들을 가진 그런 지형들의 경우는 진화를 이기기 어렵다. 그리고 지형이 계속 변할 때, 탐색 문제가 동적인 것일 때, 탐색과 활용 간의 긴장을 감안해야 할 때, 진화는 모든 알고리즘 중에서 진정 그랜드 챔피언이다.



진화의 기본 요소들

  •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 왔던 기질 중립적인 진화 버전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이것들은 진화가 작동하기 위한 필요 조건들이다.
    • 모든 가능한 디자인들을 담고 있는 디자인 공간이 존재한다.
    • 이들 디자인들을 신뢰성 있게 코드화하여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 수 있다.
    • 이 도식들을 신뢰성 있게 해독해 이들을 상호 작용자로 만들 수 있는 어떤 형태의 도식 식별자가 있다. 내생적 진화에서 도식은 자신의 고유한 식별자를 코드화 한다.
    • 상호 작용자는 모듈과 모듈의 시스템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도식에서 빌딩 블록들 형태로 코드화 된다.
    • 상호 작용자는 하나의 환경으로 바뀐다. 그리고 환경은 상호 작용자들에게 제약 조건들을 부여한다. 물리 법칙들, 기후, 레고 심판자 등 이 제약 조건들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제약 요소는 유한한 자원을 놓고 상호 작용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다.
    • 하나의 환경에서 제약 조건들은 집단적으로 적합도 함수를 만들어 낸다. 이에 따라 어떤 상호 작용자는 다른 상호 작용자보다 더 적합한 일이 일어난다.
  • 진화의 과정은 제약 조건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적합한 디자인을 찾아 디자인 공간을 탐색하는 알고리즘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알고리즘은 디자인 공간을 다음과 같이 탐색한다.
    •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식들에 변이의 과정이 일어난다. 도식자들은 수많은 작용자들, 예컨대 염색체 교차나 돌연변이 등으로 인해 변할 수 있다.
    • 도식은 하나의 집단을 만들어 내는 상호 작용자들로 바뀐다.
    • 선택의 과정이 상호 작용자들에게 작용한다. 이에 따라 어떤 디자인은 적합도 함수에 의해 다른 디자인들보다 더 적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적합도가 낮은 상호 작용자는 집단에서 제거될 확률이 보다 높다.
    • 복제의 과정이 있다. 적합한 상호 작용자들은 평균적으로 보다 큰 복제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적합도가 낮은 디자인보다 적합도가 높은 디자인에서 보다 많은 변종들이 만들어진다.
    • 상호 작용자의 적합도에 기여하는 빌딩 블록들은 시간이 갈수록 보다 빈번하게 복제되고, 이에 따라 해당 집단에서 더욱 퍼지게 된다.
    • 마지막으로 변이, 선택, 그리고 복제의 알고리즘 과정은 순환적으로 일어난다. 한 단계에서 나온 산출물은 그 다음 단계에서 투입물 역할을 한다.
  • 진화의 알고리즘이 적절히 준비된 정보 처리 기질, 적합한 모수(parameters)을 가지고 작동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 임의성에서 질서가 나온다. 단순한 임의의 디자인에서 출발, 적합도 함수의 관점에서 지시된 복잡한 디자인을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다. 모든 진화의 과정은 개방형 시스템으로 운영되며 그 겨로가 알고리즘은 국지적인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임의성을 질서로 바꾸어 나간다.
    • 적합 디자인들의 발견이다. 알고리즘은 적합 디자인을 찾아 매우 광활한 디자인 공간을 탐색하기 위한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내생적인 진화에서 어던 디자인들이 살아남아 환경의 제약 조건 하에서 복제를 해나간다면 그것들은 적합한 디자인들이다. --좋은 복제자들이 복제된다.
    • 연속적인 적응이다. 알고리즘은 적합도 함수가 무엇을 원하는지 학습하고 그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디자인들을 추구한다. 적합도 함수가 변하면 진화는 새로운 선택 압력을 반영하는 디자인들을 생산해 낸다.
    • 지식의 축적이다. 진화 과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을 축적한다. 우리가 레고 진화 과정을 멈추고 특정 시점에 모든 장난감들에 대한 도식 카드들을 분석하면 카드들에 들어 있는 정보는 역사적으로 장난감들이 진화해 왔던 적합도 환경에 관한 학습 또는 지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DNA는 생물학적 디자인들이 과거에 작업을 해왔던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 만약 당신이 다른 행성에서 떨어진 외계인이고 지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떻게 해서 지구의 한 유기체로부터 DNA를 얻었다면 그 DNA 코드만으로도 지구 환경에 대해 많은 것을 학습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당신이 DNA 식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다-- 도식들은 진화 과정에서 일종의 하드 드라이버와 같은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보들을 채워 나간다.
    • 새로운 것의 출현이다. 진화 과정 동안 알고리즘은 계속해서 새로운 변종의 디자인들을 차옺한다. 이론적 의미에서 보면 모든 가능한 디자인들은 이미 디자인 공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발견하고 실제로 만들어 냄으로써 진화는 새로운 디자인을 현실 세계로 이끈다. 레고 사례에서 진화 알고리즘은 틀림없이 어린이 스스로는 그전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디자인들을 대량으로 생산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 상의 가상적 진화를 이용해 제트 엔진의 팬블레이드에서 컴퓨터 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디자인해 보는 실험도 새로운 디자인들을 만들어 냈다.
    • 성공적인 디자인에 기여하는 자원의 증가다. 성공적인 디자인 집단들은 성장한다. 성공적인 디자인들이 경쟁에서 이겨 자원을 획득해 감에 따라 성공하지 못한 디자인들은 사라져 간다. 집단들이 크다는 것은 성공적인 도식들이 물질, 에너지, 그리고 정보 측면에서 비성공적인 도식들보다 더 많은 자원을 관리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러한 증가는 평탄한 패턴을 따르는게 아니라 공진화에서 오는 네트워크 효과와 적합도 지형 그 자체 간의 결합에 따른 단속 균형 패턴을 따를 것이다.
  • 진화는 개략적으로 상호 연관된 수준의 적합도 지형을 가진 광활한 디자인 공간에서 적합 디자인들을 찾아내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 진화는 병행 탐색을 활용한다. 사실 집단의 각 멤버는 개별적인 디자인 실험이다. 많은 보행자들이 밖에서 높은 정점을 찾아다닌다.
    • 진화는 점프의 스펙트럽을 만들어 낸다. 진화는 국지적 최고점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할 위험이 있는 짧고 점짅거인 점프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모할 정도로 긴 점프를 많이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공보다 실패 확률이 더 크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진화는 연속적인 혁신의 과정이다. 알고리즘의 순환적 특성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지형이 계속 볂는 특성을 갖고 있는 한 이는 중요하다. 진화는 탐색과 활용의 균형을 맞추어 가기 때문에 기간에 따라 보다 활발하거나 그렇지 않은 탐색 기간이 있을 수 있지만 탐색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시스템은 균형이 없다. 진화 시스템에서 정지는 소멸을 위한 처방이다.
  • 실제로 진화는 말한다. "나는 많은 것들을 시도해서 그 결과를 보고 도움이 되는 건 더 많이 하고 그렇지 않은 건 덜한다." 그러나 이 이동의 과정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알고리즘은 적합도 함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학습한다. 그리고 그 학습의 지식이 도식에 쌓여 간다. 그리하여 진화 과정은 더욱 적합한 디자인을 탐색하면서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낸다.
  • 진화는 놀이와 같다. 배역과 각본은 정해져 있지만 구체적인 배우, 세팅, 그 외의 많은 세부적인 사항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진화 과정은 생물학, 컴퓨터 가상 실험, 레고 장난감 게임에 적용될 수 이쏙, 인간 문화, 기술, 그리고 경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보편적인 진화 과정은 구체적인 기질이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조건만 구비되면 바로 앞에서 기술했던 그런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진화 이론에서 경제 현실로

  • 진화와 경제학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약 180여 년 전으로 바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프레드 마셜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의 많은 거장들이 진화를 경제학에 포함시키는 문제로 씨름해 왔지만 그들은 결국 다음 두 가지 제약을 받았다. 우선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이해를 경제적 진화에 그대로 일대일로 대응시키려는 노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예컨대 유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경제에서는 무엇인가? 기업들의 그룹은 하나의 집단인가? 경제에서 부모와 그 후손들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초기의 노력들은 발라, 제번스 그리고 다른 한계주의자(한계효용학파)들과 마찬가지로 은유적 추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 생물학 대신 3부에서 우리의 출발점은 조금 전에 우리가 기술했던 진화에 대한 일반적인 알고리즘적 관점이 될 것이다. 진화에 대한 현대의 알고리즘적 관점이 주장하는 것은 진화 시스템들은 보편적 법칙들을 따르는 하나의 보편적 클래스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는 이 클래스의 한 부분이고 이런 법칙들을 따르는지 물을 것이다. 대답이 "예"라면 경제와 생물학적 세계는 둘 다 보편적 클래스에 속한다. 이들은 알고리즘의 구체적인 실행에서 매우 다를 수 있고, 따라서 경제학에서 생물학적 진화가 말하는 부모와 자손들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세계는 진화 시스템의 일반적 법칙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강한, 일종의 가족 유사성을 보여준다.
  • 이런 방향으로 이론을 개척한 사람들은 아마도 리처드 넬슨과 시드니 윈터가 처음일 것이다. 두 사람은 <경제 발전의 진화론(Evolutionary Theory of Economic Change)>이라는 독창적인 책을 저술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들어서고 나서야 이들의 관점에서 출발한 기질 중립적인, 알고리즘적 진화 이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존 홀란드의 이정표적인 <자연 및 인공 시스템에서의 적응론(Adaptation in Natural and Artificial Systems)>은 1975년에 나왔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은 1976년에 출간 됐다. 존 메이너스 스미스의 <진화와 게임 이론(Evoution and the Theory of Games)>은 1982년에 발표 됐다. 그리고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질서의 기원(Origins of Order)>은 1993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이들 저서들을 비롯한 여러 저서들의 아이디어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관련 연구 프로그램이 만개하는데 씨앗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도 중요한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다.
  • 그러나 넬슨과 윈터는 물론이고 그들의 경제학적 선행자들은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부족했다. 오늘날 엄청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값싼 계산 능력이 당시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진화는 단순한 알고리즘이 큰 집단을 대상으로 수천 번, 수백만 번, 수십억 번 무작정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분석적 방법으로 모델링하기란 불가능하다. 1990년대 들어 컴퓨터가 더욱 강력해지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 이제 우리는 진화적 놀이의 역하로가 각본을 갖고 있다. 그 역할을 할 경제적 행위자들을 캐스팅하고 조직, 시장 그리고 국가 경제라는 세팅을 만들 준비가 돼 있다. 그런 놀이의 이야기는 바로 '부의 창출'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그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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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공부] 부의 기원/ 8. 창발성: 패턴들의 퍼즐

  • 1315년경 영국 경제는 나쁜 기후로 인한 2번의 연이은 흉작으로 바닥 없는 추락으로 빠져 들었다. 농부들은 물론 귀족과 왕실에서조차 음식을 구하기 어려웠을 정도였고, 영국 경제의 붕괴는 바로 대륙으로 퍼져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네덜란드 남서부까지 침체가 확산되었다.
  • 불경기(depression), 경기 후퇴(recession), 물가 상승(inflation) 등은 근대에 나타난 현상들이 아니라 역사의 기록이 시작된 이래 반복 되어 왔다. 경제학에서도 똑같이 오래된 패턴들이 있는데, 1인당 부의 장기적인 성장, 부의 분배 등이 그것들이다. 이런 패턴들이 그렇게 오래 됐다는 것은 경제의 작동에 깊은 뿌리를 둔 원인들, 즉 특정 시대의 기술, 정부 정책, 사업 행태 등과는 독립적인 그런 원인들의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 분명하다.
  • 생산, 실업률, 인플레이션 등 경제 관련 시계열 데이터들의 그래프를 보면 데이터들이 곳곳에서 파동을 친다. 이런 요란한 파동에도 불구하고 그 데이터에는 패턴들이 있다.


  • 위 그래프를 보면 몇 가지 패턴을 읽을 수 있는데, 첫째, 장기적 성장 추세를 읽을 수 있다. --이 그래프는 로그를 취한 것으로 실제로는 기하급수적 곡선이다.-- 그 다음 이런 장기적 성장 추세 위에는 세 가지의 낙타혹 또는 파고가 층을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각각 몇백 년간씩 지속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보다 짧은 등락의 사이클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단지 몇 년간 이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 그래프의 데이터는 그렇게 규칙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 임의적인 것도 아니다.
  • 다른 시계열 자료들도 이와 비슷하게 규칙적인 것도 아니고, 임의적인 것도 아닌 특성을 갖는다. 예컨대 미국 경기 사이클의 업앤다운(Up and Down)은 명백히 진동하는 패턴을 보여 주지만 그 진동의 빈도는 짧게는 18개월에서 길게는 9년에 걸쳐 있고, 진폭을 보면 완만한 침체들에서부터 깊은 침체들까지 나타나고 있다.
  • 경제학자들은 이와 같은 불규칙적인 역사적 패턴을 이용하여 미래 경제의 행태를 예측하는데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경제학이 답을 내놓을 필요가 있는 질문은 두 가지다. 경제 데이터의 패턴들은 왜 그렇게 규칙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 임의적인 것도 아닌 특성을 갖는가? 또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어떤 패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뿌리 깊은 구조적 특성은 무엇인가?
  • 전통 경제학은 역사적으로 이 질문에 답을 하려 노력 해왔다. 전통 경제학은 bottom-up 관점의 미시 경제학과 top-down 관점의 거시 경제학으로 구분 된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미시와 거시 경제학이 별도로 분리 되지 않는게 이상적이라는데 동의한다. 미시적 행태에서 출발해 위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하고 거시 패턴으로 출발했으면 밑으로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이론 안에서 두 가지 접근법을 끊어짐 없이 활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아직 그런 열망을 달성하지 못했다.



경기 사이클은 꼬물거리는 젤리인가?

  • 신고전파 균형 모델은 저절로 춤을 추거나 파동을 치거나 진동하는 일이 없다. 그 모델은 외부적인 충격이 가해질 때만 활기를 찾게 된다. 이렇게 균형 모델은 전파 과정을 따라 움직인다. 하나의 충격을 모델에 가하면 모델은 충격을 전달하며 하나의 산출 패턴을 생산한다. 이 모델에 대한 예로써 접시 위에 젤리 더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젤리 더미를 숟가락으로 두드리면 긴 진동이 젤리 전체로 전달되면서 다른 쪽으로도 전해져 젤리가 파동을 치거나 흔들린다. 이렇게 두드리는 것은 외생적 투입이고, 다른 쪽에서 파동 치는 것은 산출 패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전통 경제학 문헌에서 이렇게 움직이는 모델들은 실제 경기 사이클 모델로 알려져 있다. 이 모델들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핀 키들랜드와 에드워드 프레스코타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 그러나 전통적인 젤리 모델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전통 이론은 보통 외생적 투입을 임의적인 것 --최소한 예측이 가능한 패턴을 갖지 않은 것-- 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젤리에 대한 투입이 정말 임의적인 것이면 그 산출 또한 임의적일 것이다. 신호는 전파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변형될 수 있지만 그 산출은 그래도 임의적일 것이다. 이제 숟가락으로 두드리는 투입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젤리의 파동을 그래프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산출 파동은 정확히 숟가락으로 두드린 투입과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즉, 두드리는 것이 젤리 전체로 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진동이 더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번 두드리면 3-4개의 파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파동이 처음 두드린 것과는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여전히 임의적이다. 젤리 혼자서는 임의적이고 무질서한 투입을 취하거나 복잡한 질서를 추가할 수 없다. 젤리는 하나의 균형 시스템이다. 두드리기를 멈추면 젤리는 안정을 되찾아 움직임을 멈출 것이다. 젤리가 진실로 질서 있는 파동을 만들어 낼 유일한 방법은 두드리기라는 투입도 질서 있게 이루어지는 경우다. 만일 SOS를 위한 모스 코드를 젤리에 집어 넣으면 산출 파동은 더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SOS 신호의 구조를 담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실제 경기 사이클에 대한 미시 경제학의 접근은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임의의 데이터를 집어 넣으면 그 산출물은 실제 세계와 별로 비슷하지 않다. 또는 어떤 구조를 갖는 데이터를 집어 넣은 뒤 모델에 어떤 효과를 추가함으로써 산출물이 그렇게 규칙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 임의적인 것도 아닌 실제 데이터의 특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해당 사이클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 설명을 외부 요인들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는 이제 신케인지언

  • 경제학의 다른 측면, 거시 경제학이 해왔던 일 쪽으로 가보면 이와는 다른 접근법을 볼 수 있다. 거시 경제학자들은 반드시 데이터로 시작해 이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거시 경제학 이론의 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규칙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임의적인 것도 아닌 특성을 가진 경제를 거시 경제학자들이 신뢰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통적인 미시 경제학의 정통성에서 물러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시 경제학자들은 좀 다른 방향에서 자신들의 철길을 놓아야 했다.
  • 합리적 균형이라는 집단 또는 조직으로부터의 일탈과 관련하여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전기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6년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을 썼을 때였다. 1930년대 동안 케인스는 근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불균형 사건 중 하나인 대공황을 목격했다.
  • 신고전파 미시 경제학 이론은 균형을 이룬 경제는 완전 고용의 경제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경제가 그 조건에서 어떻게 이탈할 수 있는지, 또 복귀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내놓아야 했다. 케인스가 발전시킨 이야기, 즉 일반 이론은 이에 대한 하나의 동태적인 스토리였다.
  • 어떤 이유로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섰다고 생각해 보자. 예컨대 정치적 불확실성이나 자연재해 또는 전쟁 등으로 말이다. 소비자들과 사업가들은 보다 보수적으로 변하고, 덜 쓰고, 현금에 보다 집착하기 시작한다. 특정 시점에 경제에 있는 현금의 양은 고정적이기 때문에 이런 행태들이 나타나면 유통되는 현금은 줄어 든다. 이는 농부, 제조업자, 상점 주인 그리고 다른 생산자들의 소득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스스로 소비도 줄이고 투자도 줄인다. 그 결과 또 누군가의 소득이 줄어든다. 결국 소비와 투자의 급감으로 인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이는 또 다시 불안감으로 이어져 소비는 더 줄어든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다 보면 급감하는 소비와 투자, 상승하는 실업률 그리고 소비자들과 사업가들 사이에 점증하는 불간감이라는 안 좋은 방향으로의 악순환이 가속화 된다.
  • 화폐 공급의 이런 위축은 종국적으로 자정 능력을 갖는다고 균형 경제학은 말한다. 즉, 물가와 임금은 화폐 유통량의 감소를 반영해 떨어지고 결국 모든 것은 정상적인 완전 고용 균형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 대공황 때 물가와 임금은 분명히 떨어졌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으로 사람들은 소비를 그전보다 훨씬 덜했고 --디플레이션 환경에서 돈은 미래에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현금을 쥐고 있는 것이 최선이다.-- 그 결과 상황은 더욱 나쁜 방향으로 확산되어 갔다. 케인스는 이런 동태성으로 인해 경제가 아주 오랜 기간 균형에서 벗어난 상태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를 완전 고용으로 되돌리려면 정부가 화폐를 경제 시스템에 투입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의 투입으로 소비 하락을 막고, 실업률 상승으로 멈추게 하면 신뢰가 다시 회복돼 악순환 사이클을 선순환 사이클로 역전 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 전후 수년간 서양 정부들은 케인스의 이런 아이디어를 널리 채택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수십 년 동안의 경제 사이클을 보면서 케인스의 아이디어는 논쟁 거리가 되고 있다. 이 논쟁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정점에 달했는데, 당시 밀턴 프리드먼은 케인스가 주창했던 정부 지출과 같은 것으로는 장기 성장에 이르는 게 아니라 더 높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의 이 주장은 1970년대 고인플레이션, 저성장 기간 동안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 뒤 프리드먼의 시카고 대학 동료 로버트 루카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케인스 이야기의 동태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완전히 합리적이라면 그들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경제가 나쁜 쪽으로 확산돼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며, 이에 따라 자신들의 행태를 스스로 조정해 경제를 다시 완전 고용 균형으로 되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합리적인 소비자들과 생산자들은 개입하려는 정부의 시도를 이미 간파하여 정부의 조치를 예상하고 그 정책의 효과를 무력화 시키는 쪽으로 행동한다. 그리 되면 결국 정부 개입은 불경기를 막는데도 실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루카스의 이론은 수학적으로 근사했고 그는 이 연구로 1995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더 강력한 이런 합리성 버전은 수많은 전통 경제학자들의 고지식함을 맘껏 이용한 것이다.
  • 루카스의 연구에 이어 UC 버클리 대학 교수이자 2001년 노벨상 공동 수상자인 조지 애커로프는 허버트 사이먼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이런 주장을 내놨다. 사람들이 슈퍼마켓에서 토마토를 사면서 정부의 미래 재정 적자를 추정하려고 노력한다는게 실제로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데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도 소비해야 하는데,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얘기다. 애커로프는 귀납적인 합리성 모델(inductively rational model)을 정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을 보여 주었다. 즉, 소비자와 생산자가 완전 합리성에서 약간 모자란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정확히는 사람들이 결정을 어떻게 내리든 상관 없이-- 케인스가 말한 동태성이 작동되고, 그 결과 경제가 침체로 빠져 드는 데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애커로프는 또한 시간 지체가 경제의 동태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특히 가격과 임금의 고착성과 즉각적인 조정을 할 수 없는데서 오는 시간 지체에 주목했다. 그의 모델은 또 정부가 시장에 유동성을 증가시킴으로써 악순환에 반작용을 가하는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애커로프의 연구는 에드먼드 펠프스, 올리비에 블랜차드, 그레고리 맨큐와 같은 인물들의 연구와 합쳐져서 오늘날 '신케인지언 경제학'의 영역으로 발전했다. 신케인지언 경제학이 경제 이론가들 사이에서는 좀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정부와 월스크리트 등 실제 세계에서 사람들은 이자율과 재정 적자 같은 요소들에 대한 정부의 관리가 경제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
  • 21세기 초에 전통 경제학은 우리가 경제에서 보는 진동 패턴들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경쟁적인 가설을 제시한다. 미시 경제학에 기초한 '실제 경기 사이클 이론'은 합리적 균형 모델 관점에 의지하며 경제를 외부 충격을 단지 전파하는 것으로 본다. 이 이론 하에서 경제적 진동의 핵심 원인들은 외부적인 정치 사건, 기술 변화, 그리고 기타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경기 사이클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 외생적 요인들상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역사 내내 왜 그렇게 끈질기게 반복되는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 주지 못한다. 
  • 거시 경제학에 토대를 둔 신케인스주의는 전통적 정통성에서 뒤로 물러나 완전하지 않은 합리성 동태성, 그리고 시간 지체 등을 받아들여 내생적인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많은 측면에서 신케인스주의는 복잡계 경제학을 향해 한 발짝 나간 것이다. 그러나 신케인스주의는 균형을 포기할 준비가 안 되었다. 그 결과 이론의 실증적 성공은 지금까지 제한적이었다.



모아 놓으면 다르다

  • 복잡 적응 시스템에서 행위자들의 미시적 상호 작용이 어떻게 거시적 구조와 패턴을 유발하는지 논의한 적이 있다. 예컨대 슈거스케이프에서 매우 단순한 행위자들조차 그 상호 작용이 경제 성장과 소득 불평등 같은 패턴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복잡계 경제학이 생각하는 궁극적인 업적은 행위자 네트워크, 진화의 이론에서 시작해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보는 거시적 패턴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런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이론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어떠할지 그 희미한 빛이라도 볼 수 있게 됐다.
  • 그 이론은 거시 경제학적 패턴을 '창발적(emergent)' 현상들, 다른 행위자나 환경과의 상호 작용으로 생겨난 시스템의 전체적 특성들로 본다. 복잡계 경제학 역시 경기 사이클, 성장, 인플레이션 등과 같은 경제적 패턴들을 시스템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내생적으로 일어나는 창발적 현상들로 본다. 복잡 적응 시스템들은 많은 형태의 시스템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테마적인 창발적 패턴들을 갖고 있다. 이 패턴드을 분석하면 그런 시스템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그런 테마적인 세 가지 패턴, 진동, 단속 균형, 거듭제곱의 법칙 등을 살펴볼 것이다.



진동: 맥주 세계의 호황과 불황

  • 앞 뒤로 움직이는 시계추, 기타 줄의 떨림, 심장 박동 등은 모두 진동 시스템의 사례다. 경제는 경제 전반의 경기 사이클, 산업 차원의 상품 사이클, 그리고 보다 장기에 걸친 파동 변황에 따라 진동한다.
  • 진동은 복잡 적응 시스템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이다. 예컨대 생물의 생태계에서 개체 수는 진동의 패턴을 따른다. 20세기 초반 우크라이나 화학자 알프레드 로트카와 이탈리아 수학자 비토 볼테라는 생태계에서 약탈자와 먹잇감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 발생하는 진동을 묘사하기 위해 유명한 모델을 만들었다. 예컨대 여우와 토끼의 개체 수를 생각해 보자. 토끼의 개체 수가 증가하면 여우는 보다 많은 토끼를 잡아 먹을 수 있으므로 여우의 개체 수는 증가하고 그러면 잡아 먹히는 토끼가 많아지므로 토끼의 개체 수는 다시 감소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토끼의 개체 수가 감소하면 먹잇감이 줄어드므로 결국 여우의 개체는 줄어들고 이에 따라 토끼의 개체 수는 다시 늘어난다. 여우와 토끼의 개체 수 진동은 이렇게 일어난다. 이런 동태적 시스템은 결코 정지하지 않고 무한히 진동한다. 로트카와 볼테라 모델에서 진동을 초래하는 외생적인(exogenous) 충격은 없다. 부침(ups and downs)은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의 구조에서 나온다.
  • 그렇다면 경제 시스템의 구조에서 어떻게 내생적인 진동이 발생하는 것일까? 사실 경제 시스템을 내생적으로 진동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1950년대 MIT의 제이 포레스터는 '맥주 유통 게임'으로 불리는 게임을 만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의 행동과 동태적인 구조를 결합할 경우 이것이 어떻게 상호 작용을 통하여 간단한 경제 시스템에서 진동을 만들어 내는지를 증명했다.
  • 먼저 네 명의 지원자들에게 상품의 제조와 유통을 시물레이션 게임을 시킨다. 네 명의 학생들은 각각 양조 업자, 유통업자, 도매업자, 소매업자의 역할을 맡는다. 제조업자, 유통업자, 도매업자, 소매업자로 구성된 공급 체인은 물론 많은 산업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구조이다. 이 게임에서 맥주 소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없다. 소비자 수요는 소매업자 옆에 엎어 놓은 카드 더미 형태로 제공된다.
  • 이 게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각 참가자는 맥주 상자들을 재고로 갖고 있다. --이는 게임 점수판에 칩으로 표시된다.-- 매회 초기에 소매업자가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받으면 --예컨대 4상자-- 옆의 카드 더미에서 카드를 꺼내어 뒤집은 뒤 도매업자에게 주문을 넘긴다. 도매업자는 소매업자로부터 온 주문을 보고 유통업자에게 넘긴다. 유통업자는 이 주문을 양조업자에게 제출한다. 각자는 일단 주문을 받으면 맥주 상자를 실어 보냄으로써 주문을 충족한다. 양조업자는 유통업자에게 실어 보내고, 유통업자는 도매업자, 그리고 도매업자는 소매업자에게 각각 실어 보낸 후 소매업자는 맥주를 고객에게 판다. 주문 흐름은 고객에서 양조업자로 공급체인을 따라가지만, 맥주 흚은 그 반대다. 주문이 제출되고 맥주가 공급되면 그 다음 회의 게임이 시작된다.
  • 한편 참가자들은 보유한 재고에 대해 상자당 0.5달러를 지불한다. --맥주를 쌓아서 보관하는 비용-- 그리고 맥주의 재고가 바닥나는 경우에는 상자당 1달러를 내야 한다 --화난 고객과 판매 손실을 감안-- 따라서 참가자들은 재고가 바닥나는 일 없이 주문을 충족 시키기에 충분한 재고를 보유하려고 한다. 비용의 비대칭성 때문에 --추가적인 재고 비용보다 부족 비용이 더 크다-- 플레이어들은 약간의 추가적 재고를 가지려는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게임의 승자는 가장 적은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다. 말은 쉽게 들리지만 몇 번의 곡절 또는 변화가 일어난다. 실제 생활에서처럼 맥주를 주문하는 시점과 주문된 맥주를 받는 시점 사이에 시간 지체가 있다. 예컨대 맥주를 생산해서 트럭에 실어 보내는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주문을 내는 시점과 그것이 처리되는 시점 간에도 조그만 시간 지체가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주문을 받고 이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신용을 체크하는 등의 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문을 하는 것 외에는 어떤 상호 작용도 참가자들 간에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양조업자는 고객 수요가 소매업자 쪽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 모른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유통업자들이 보내온 주문이다.
  • 이런 시간 지체들은 상황을 좀 혼란스럽게 만든다. 가령 당신이 유통업자인데 도매업자로부터 큰 주문을 받는다고 하자. 우선 당신이 보유한 재고에 갑작스러운 감소가 일어난다. 그러면 당신은 그 재고를 채워넣기 위하여 제조업자에 큰 주문을 낸다. 그러나 맥주를 바드려면 몇 회가 걸릴 것이고, 그 사이 또 큰 주문이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다음에도 높은 수요가 이어질 것을 예상해 아예 주문을 더 크게 내야 할까? 그러나 일시적인 하락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자칫 2회 뒤에는 당신의 재고가 맥주로 넘칠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들의 행동과 행동에 대한 반응 사이에 시간 지체가 있는 경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 이 게임은 정확히 균형에서 출발한다. 각 참가자들은 4상자의 맥주를 주문받고 정확히 그만큼을 실어보낸다. 수송 파이프라인 또한 꽉 찬 채로 출발, 각 참가자는 게임 1회에서 정확히 4상자의 맥주를 접수한다. 따라서 공급 체인 전체에 걸쳐 재고 수준은 그대로다. 그 이후부터 참가자들은 각자 알아서 스스로 얼마나 주문할지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참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소비자 덱에 쌓여 있는 첫 카드들은 4개를 유지한다. 참가자들에 따라서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 회피적이냐에 따라 4개보다 좀 더, 혹은 좀 덜 주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회에 이르러 소비자 수요가 4개에서 8개로 갑자기 늘어난다. 참가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소비자 수요 수준은 앞으로 남은 게임 동안 8개로 유지될 것이다. 한 번에 주문이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주문의 증가는 공급 체인을 따라 예상치 못한 변화로 이어진다. 전통 경제학에 따르면 수요 측면에서 외생적인 추격이 발생하면 참가자들은 몇 번의 조정 후에 새로운 균형으로 옮겨 가게 돼 있다. 일단 균형에 도달하면 모든 참가자들은 8개를 주문하고 그 결과 각자의 재고도 그대로 유지된다.
  • 그러나 실제 사람들과의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주문의 갑작스러운 점프로 재고 수준이 떨어지자 초과 주문을 하는 등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초과 주문의 파장은 공급 체인을 따라 전달되는 과정에서 확대된다. 수요가 4개에서 8개로 늘어나는 것에 놀란 소매업자는 재고를 다시 채워 넣을 필요를 느낄 것이고, 따라서 12개를 주문한다. 소매업자의 주문이 12개로 늘어나는 것을 본 도매업자는 16개를 주문한다. 그런 식으로 파장이 이어진다. 이런 넘치는 행동 외에도 참가자들은 주문과 실제 수령 상의 시간 지체를 적절히 고려하지 못한다. 그 결과 소매업자는 지난 회에 12개를 주문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아 재고는 계속 바닥이다 그는 12개를 더 주문한다. 이런 식의 불가피한 결과가 초래되면서 결국 많은 양의 맥주가 공급 체인을 따라 다시 흘러들어가기 싲가하고 각 참가자들은 재고의 늪에 빠져 버린다. 그러면 이런 과잉 반응 사이클은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즉, 일부 참가자들은 주무을 줄이기 시작하고 심지어 일부는 아예 주문ㅇ르 하지 않기도 한다. 과잉 주문과 과소 주문의 진동 파장은 공급 체인을 따라 부침을 거듭한다. 이에 따라 가상의 맥주 사업도 매우 값비싼 부침의 사이클을 겪는다.



  • MIT 교수 존 스터먼과 그 동료들은 세계 여러 곳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맥주 게임을 수백 번이나 했는데, 여기에는 MBA 학생부터 사업가들, 임의로 선정된 사람들, 전문적인 재고 관리자들, 고도로 합리적인 경제학자 등이 포함되었다. 결과는 언제나 같았는데, 거친(wild) 진동의 파장 보였다. 전통 경제학 이론은 참가자들이 완전하게 합리적일 경우 거친 진동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게임은 한 균형에서 다른 균형으로 말끔하게 이동한다는 의미다. 실험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이론적으로 합리적인 경우에 발생하는 비용을 계산하면 실제 사람들에 의해 발생하는 비용은 평균적으로 완전 합리적인 비용의 10배에 달한다.
  • 어떤 종류의 행태로 인해 그렇게 단순한 실험에서 거친 진동의 파장이 일어나는 것인가? 스터먼은 참가자들이 활용한 의사 결정 규칙을 통계적으로 추론해 낼 수 있었다. 이 규칙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일단 닻을 내리고, 그 다음 조절한다"는 행태에 기반을 둔 것이다. 참가자들은 재고 수준을 살피고, 시간 지체의 효과를 고려해 자신의 미래 수요를 연역적으로 계산하기 보다는 단순히 주문과 재고 수준에 대한 과거의 패턴을 보고 귀납적으로 추론해 정상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패턴에 닻을 내린다 --시선을 고정한다는 의미다-- 'IF, THEN' 규칙이 논리적으로 그들을 정상적인 패턴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어떤 참가자는 4상자의 맥주를 정상적인 주문 패턴으로 보고 상황이 달라지면 이를 중심으로 조절하려고 한다. 예컨대 "재고가 떨어지고 있다. 더 주문해!" 이런 식으로 의사 결정을 내린다. 시간 지체가 있는 환경에서는 일단 닻을 내리고 조절한다는 규칙이 개인들을 과잉 반응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 사이클 행태라는 '창발적 패턴'이 발생한다.
  • 맥주 게임은 젤리와 같은 전파 과정이 아니다. 물론 이 게임에도 하나의 회생적인 충격을 받는다. 즉, 주문이 4개에서 8개로 증가하는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한 번의 두들김을 받은 젤리와 달리, 맥주 게임에서는 진동이 시작되면 시스템이 결코 균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맥주 게임에서 진동의 궁극적인 원천은 외부적인 충격 그 자체가 아니라 --사실 이것은 단지 시스템을 불할하게 한다는 것 뿐임-- 참가자들의 행태와 시스템의 반응(feedback)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외생적인 동력을 전파하는게 아니라 내생적으로 동력을 창출한다.
  • 미시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개별 행태상의 예측불허 변화들이 모이면 거시적 차원에서는 크고, 창발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앞의 사례는 "일단 닻을 내리고 나서 조절한다" 는 규칙이 어떻게 진동을 발생시키는지 보여 준다. 그렇다면 거시 경제의 회전은 훨씬 복잡한 차원의 맥주 게임과 같은 것이 만들어 낸 결과인지 물을 것이다. 경제는 결국 공급 체인, 재고, 시간 지체들로 가득 차 있다. 거시 경제의 실제 진동의 원인은 가지 각색이지만 맥주 게임이 주는 교훈은 사잌르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의사 결정에서 활용하는 귀납적 규칙들이 경제 시스템의 동태적 구조와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 경제가 거대한 맥주 게임과 같은 것이라면 이것이 던지는 한 가지 시사점이 있다. 그것은 금리 인하, 재정 지출 증가와 같은 표준적인 해법들은 사이클의 근원을 다룬다기 보다는 단지 그 증상을 다룬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기 사이클을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지만 --실은 주기적인 경기 위축기가 오면 비효율적인 자원의 사용을 씻어 내고 혁신을 부추기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사이클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을 우리가 원치 않을 수도 있다.-- 정부가 보다 근본적인 방법으로 사이클의 효과를 감소 시키고자 한다면 경제 시스템 자체의 구조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사실 경제의 동태적 구조는 명시적인 정부의 개입이 없다고 하더라도 계속 변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맥주 게임의 사이클을 줄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시간 지체를 줄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참가자들에게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1960년대 시작된 정보 기술 혁명은 이 두 가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데이터를 보면 미국의 경기 사이클 변동성은 1959년 이후 계속 줄어 왔으며, 특히 1980년대 들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빠르고 값싼 컴퓨터의 광범위한 확산과 정확히 일치한다. 컴퓨터 덕분에 기업들은 신속한 주문 처리, 저스트인타임(just-in-time), 재고 관행 채택, 생산자와 부품 등 공급 체인 간 전자적 연결이 가능해졌다. 줄어든 사이클 변동성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을 다른 요인들에 비해 기술 및 산업 관행의 변화로 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맥주 게임이 변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속 균형: 핵심 기술이 있는가?

  •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온 뒤 한 세기 동안 생물학자들은 진화는 위엄이 있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진행돼 평단한 종의 형성과 소멸의 패턴을 보인다고 가정했다. 그 뒤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와 나일스 엘드리지는 1972년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기존의 이런 관념을 뒤집었다. 그들은 화석 기록은 진화가 평탄한 경로를 결코 따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오히려 진화는 오랜 기간 동안의 정체 상태와 더불어 폭발적인 혁신과 대량 소멸 기간들이 곳곳에 가미된 그런 과정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예컨대 5억 5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터진 진화 혁명 때 다세포 생물의 지구 지배가 일어났다. 오늘날 지구에 있는 주요 종족들의 대부분이 이 당시 탄생했다. 그 후 약 2억 4,500만 년 전, 후기 이첩기 동안 굴드가 말하는 '조상의 대소멸'이 일어났다. 지구 위 해양 종족들의 96%가 사라졌다. 굴드는 이와 같이 고요와 폭풍이 교차하는 패턴을 표현하기 위하여 '단속 균형(단선적, 불연속적 균형)'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기술적으로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진화는 수학적 의미에서 균형 상황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굴드가 이 용어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정적 혹은 정체의 기간들에 변화의 기간들이 가미된다는 그런 의미였다고 스스로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이 고착화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대로 사용했다.
  • 단속 균형의 패턴은 생물학적 진화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눈사태에서부터 주식 시장의 폭락에 이르는 다른 복잡 시스템에서도 나타난다. 복잡계 연구자들은 1980년대부터 이런 패턴들과 그 기원들을 쭉 연구해 오고 있다. 이 연구의 결론 중 하나는 이런 행태를 가져오는데 가장 중요한 기여자는 바로 시스템에서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네트워크 구조라는 점이다. 산타페 연구소의 던컨 와츠와 마크 뉴먼은 많은 형태의 네트워크들이 매우 밀도 있는 연결과 매우 듬성듬성한 연결을 서로 혼합해 놓은 구조를 향해 자기조직화 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인도 과학연구소의 산제이 제인과 네루 센터의 산디프 크리슈나는 생물 생태계에서 단속 균형이 출현한 밑바탕에는 그런 네트워크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 제인과 크리슈나는 컴퓨터 창조물들의 진화 생태계에 관한 가상 실험을 고안했다. 연구자들은 이 실험에서 임의로 어떤 종들을 제거할 경우 대개는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따금 어떤 종들의 경우는 이를 제거하면 일련의 연쇄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대량 소멸로 이어졌다. 이런 종들은 먹이사슬과 생태적 지위의 경쟁 측면에서 다른 종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생물학자들은 이런 종들을 '핵심 종'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아메바 같은 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종은 다양한 곤충들과 여과 섭식(filter feeding) 연충의 먹이 원천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다양한 새들과 포유동물들의 먹이가 되고, 새들과 포유동물들은 여러 식물의 종들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먹이사슬 밑바탕에 있는 아메바 개체 수에 갑작스러운 감소가 발생하면 그 파장은 생태계 전반으로 퍼질 수 있다.
  • 생태계 시뮬련이션을 통해 제인과 크리슈나는 단속 균형에는 세 가지의 뚜렷한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임의의 국면(random phase)이다. 네트워크가 퍼져 나가지만 특정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임의의 여러 변화들이 일어나지만 이 단계에서는 큰 효과를 수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국면은 균형의 기간이다. 그 뒤 어떤 혁신이 일어나면서 네트워크는 성장 국면으로 바뀐다. 국면 전환을 가져오는 이런 혁신은 양의 되먹임 고리를 통해 다른 혁신들을 촉진 시킨다. 혁신이 추가적인 혁신을 유도하는 것이다. 새로운 종들이 나타나 생태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먹이와 생태 지위 네트워크에 질서가 형성된다. 이런 성장 국면은 계속 이어지는게 아니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성장 국면이 완화되면서 조직화된 국면이 나타난다. 이 단계에서는 모든 변화들이 통합되고 네트워크는 고도로 구조화된다. 그리고 핵심 종들은 상호 작용 네트워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다. 마치 항공기의 비행 경로를 그린 지도에서 허브 역할을 하는 도시처럼 말이다. 네트워크는 조직화된 국면에서 한동한 계속해서 끓기만 한다.(균형의 또 다른 기간이다.) 그러나 그 뒤 어떤 혁신이나 돌연한 변화가 핵심 종들에 타격을 가하는 일이 발생한다. 핵심 종에 영향을 주는 변화는 전체 조직 구조로 퍼져 나가고 네트워크는 멸종의 파고 속에서 무너진다. 이런 과정이 지나고 나면 다시 새로운 임의의 국면이 전개되고, 그 다음에는 성장 국면이 오는 식으로 반복된다.
  • 많은 관찰자들은 기술 혁신은 정적과 폭풍이라는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중에는 카를 마르크스와 요제프 슘페터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기술 혁신은 제한된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1957년 GE는 석영 할로겐 램프를 발명했다. 이 기술은 1980년대 이르러 가격이 매우 싸졌고, 그 결과 할로겐 전구는 대중적인 소비 제품이 되었다. 할로겐 전구는 표준 백열광 전구에 비해 하나의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사회에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에 비해 처음에는 선행 기술에 대해 점진적인 발전에 불과했지만 커다란 영향을 몰고 온 것들도 있다. 1901년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영국 콘월에서 대서양 건너편 캐나타의 뉴펀들랜드로 전파를 이용해 세 번의 모스 코드 신호를 보냈다. 마르코니의 발명은 유선 전신에 비해 보다 싸고 편리한 대안 정도의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발명은 인상적인게 아니었다. 당시 '파이낸셜 타임스'의 인용에 따르면 앵글로 아메리칸 케이블 회사는 이 신기술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 "무선 전신 기술의 가능성은 상업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낙관한다." 라디오는 그것만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 뒤 TV, 마이크로파 통신, 레이더, 이동 전화, 무선 인터넷의 발명을 유도했다. 마르코니의 발명은 대중문화, 오락, 정치, 군사 전략에 이르기까지 눈사태 같은 변화를 불러왔다.
  • 지난 수년에 걸쳐 기술 개발을 하나의 진화 과정으로 보는 많은 연구들이 진행돼 왔다. 이 연구에서 제기된 두 가지 중요한 관찰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단속 균형과 관련이 있다. 첫째, 어떤 기술도 독립적으로 개발되지 않는다. 모든 기술은 다른 기술들과의 관계에 의존한다. 예컨대 이동 전화의 발명은 라디오 기술을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 기술과 코딩 기술 등 다른 많은 분야를 활용했다. 이러한 상호 관계들은 단순히 기술적인 것이 안니라 경제적인 것이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그 주변에서 같이 성장한 경제적 연계망에는 철강에서부터 석유, 호텔, 패스트푸드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업들이 포함돼 있다.
  • 둘째,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킴 클라크가 지적했듯이 기술은 본질적으로 모듈적이다. 예컨대 자동차는 엔진, 변속기, 차체 등으로 만들어 졌다. 이런 모듈들이 조립돼 만들어진게 이른바 아키텍처(architecture)다. 모듈의 혁신은 새로운 아키텍쳐를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마이크로 칩으로 PC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후속적으로, 연관되는 혁신들을 촉진하는 등 큰 파급 효과를 갖는 경우는 아키텍처 혁신이다.
  • 우리는 제인과 크리슈나 모델에서 단속 균형 패턴을 가져오는 중요한 특징 두 가지를 알았다. 상호 작용을 하는 네트워크와 개별 노드의 촉매 효과다. 11장에서 기술 연계망이 어떻게 연쇄적 변화와 연관되면서 단속 균형이라는 창발적 패턴을 유발하는지, 그리고 어떤 특정 기술들은 이 연계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거듭제곱 법칙: 지진과 주식 시장

  • 참고) 용어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거듭제곱의 법칙을 다른 곳에서는 멱함수 법칙이라고도 한다.
  • 참고) 랜덤워크란 한 지점에서 출발한 사람이 일직선 위를 1회에 일정한 거리 a만큼 멋대로 움직일 때 n회 걸음을 옮긴 후 출발점으로부터의 거리 r와 r+dr 사이에 있을 확률을 구하는 문제. 난보(亂步) ·취보(醉步)라고도 한다.



  • 위 그림은 예일 대학의 수학자 베노이트 만델브로트의 연구에서 따온 것이다. 하나는 1959년부터 1996년까지 IBM의 주식 가격에 로그를 취한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랜덤워크 데이터이다 --이 랜덤워크는 그 안에 하나의 성장 추세를 갖고 있다.-- 이 그래프는 매우 비슷해 보여서 구분을 해 놓지 않으면 어느 것이 IBM 주식이고 어느 것이 랜덤워크인지 알기 어렵다. 이 때문에 랜덤워크는 100년에 걸쳐 금융이론의 핵심이 되어 왔다.



  • 그러나 절대적인 가격 수준이 아닌 특정한 날에 주식 가격이 얼마나 올라가고 내려갔는지를 표현한 위 그림에 의하면 두 그래프는 매우 다르게 보인다.
  • IBM 주식 그래프에는 뾰족한 곳들이 군데군데 있는데, 다시 말해 가격이 크게 움직인 기간과 작게 움직인 기간들이 시간에 따라 집적 형태로 나타난다. 반면 아래의 랜덤워크 그래프는 가격이 크게 움직인 기간과 작게 움직인 기간들이 사간에 따라 임의적으로 혼재한 양상으로 모호해 보인다. 이렇게 보면 IBM 데이터는 모호한 랜덤워크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몇 연구자들은 주식 가격이 랜덤워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 군데군데 집적 모양의 IBM 패턴은 가격의 변동성이 시간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속균형이 보여주는 폭풍-고요-폭풍이라는 형태의 연속과 유사하다. 랜덤워크 그래프에서는 가격의 움직임이 다른 것에 비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없지만 IBM 데이터는 다른 것에 비해 높이 치솟은 것들도 있고 푹 꺼진 것들도 있다. 무엇이 이렇게 극적인 가격 움직임을 초래하는 것인가?
  • 전통적 경제학에서는 새로운 뉴스가 시장에 전달될 때 주식 가격이 변동한다고 말한다. 전통 이론의 예측 중 하나는 가격의 큰 움직임은 예상치 못한 빅뉴스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커틀러, 제임스 포터바, 래리 서머스는 1989년 한 연구에서 이런 예측을 검정해 봤다. 그는 1941년부터 1987년까지 가장 변도잉 컸던 미국 주식 시장 움직임을 살펴보고 그 당시의 신문을 쭉 훑어 시장의 큰 움직임과 일치하는 뉴스가 무엇인지 조사했다. 그러나 실제로 주식 시장의 대폭락 시점 앞뒤로 그렇게 특이한 뉴스들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87년 S&P 500 지수가 20% 폭락한 것에 대한 '뉴욕 타임스'의 설명은 "달러 가치 하락과 재정 적자에 대한 우려" 였으나 이것은 매번 제기되던 이슈이지 새로 불거진 이슈는 아니었다. 1946년 9월 3일 또 다른 폭락이 있었던 날, 신문의 기사 제목은 "가격이 급락할 근본 이유가 없다" 였다.
  • 커틀러와 그의 동료들은 뒤집어서 살펴보기도 했다. 즉, 해당 기간 동안 큰 뉴스들을 조사해서 그 당시 주식 시장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살펴보았다. 예컨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 주식시장은 단지 4.4% 떨어졌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평화적으로 해결 됐을 때 시장은 단지 2.2% 올랐을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길 수 있다. 왜 그렇게 큰 뉴스가 시장의 변동성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관찰에서 얻을 수 있다. 주식 가격 움직임은 랜덤워크를 많이 닮은 게 아니라 이와는 다른 현상, 즉 지진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 1950년대 캘리포니아 기술연구소 출신 지리물리학자들인 베노 구텐베르크와 찰스 리히터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도서관에서 지진을 다룬 연구들을 죄다 찾아보았다. 이들은 얼마나 많은 지진들이 여러 가지 강도별로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다. 예컨대 규모 2의 지진은 규모 4의 지진보다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더 큰가와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지진 자료들을 각 구간별로 나누어보았다. 예컨대 규모 2.0~2.5, 2.5~3.0 등으로 나누고 분포 곡선을 그려 보았더니 슈거스케이프의 소득 자료 그래프와 비슷하게 나왔다.
  • 가장 잘 알려진 분포는 종형(bell curve)이다. 이는 '정상 분포', '가우스 분포' 등으로 불린다. 만약 우리가 어떤 모집단에서 여자의 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 분포를 그려보면 종 모양의 곡선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여자들의 키는 150-180cm 사이에 존재하며 키가 과도하게 크거나 작은 여자들은 매우 적다는 얘기다.



  • 위 그림은 구텐베르크와 리히터가 그린 그래프에 로그를 취해 표현한 것이다. 이 그래프는 지진이 클 수록 그 빈도 수는 적어진다느 ㄴ것을 보여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진 에너지가 2배가 될 경우 그런 규모의 지진이 발생할 확률은 1/4로 떨어진다. 그 결과 그래프는 오른쪽으로 가면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물리학자들은 이런 관계를 거듭제곱 법칙(power law)라고 부른다. 분포가 지수 또는 거듭제곱을 갖는 방정식으로 표현된다는 이유에서다.
  • 거듭제곱의 법칙은 여러 광범위한 현상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생물들의 소멸 사건들의 규모, 태양 표면의 폭발 강도, 규모별 도시 순위, 교통 혼잡, 면사의 가격, 전쟁에서의 사망자 수,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섹스 파트너의 분포 등이 그렇다. 거듭제곱 법칙은 진동과 단속 균형과 더불어 복잡 적응 시스템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 지진이 처음으로 발견된 거듭제곱 법칙은 아니다. 사실 거듭제곱 법칙의 첫 발견은 경제학에서였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빌프레도 파레토다. 물론 당시에는 그것이 거듭제곱 법칙인지 몰랐다. 소득이 1% 증가할 때 그에 해당되는 가구 수의 감소 폭은 1.5%였는데, 양 축에 로그-로그를 취하면 직선이 나온다.
  • 거듭제곱 법칙은 1960년대 경제학에서 다시 살짝 나타났다. 베노이트 만델브로트가 시카고 상품 거래 시장에서 면사 가격의 변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다. 만델브로 만델브로트는 데이터를 그래프로 그렸을 때 면사 가격 변동이 IBM 주식 가격처럼, 전통 이론이 예측하는 것보다훨씬 더 큰 움직임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게다가 그는 이 가격 변동에는 어떤 자연적인 시간 척도가 없는 것 같다는 점도 발견했다. 그래프의 한 부분, 가령 한 시간 구간을 잘라 하루 길이로 늘렸더니, 어느 그래프가 시간별 데이터이고 어느 것이 1일 데이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금, 밀 등 다른 상품 데이터들도 조사했는데 똑같은 패턴을 보였다. 바로 거듭제곱 법칙이었다. 만델브로트의 발견을 경제학자들은 무시했는데, 어떤 이들은 그가 수학자였기 때문에, 또 다른 이들은 그의 연구 결과가 전통 이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 파레토와 만델브로트가 했던 발견의 놀라운 특성은 1980년,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조명 받았다. 경제를 복잡 적응 시스템으로 보는 아이디어들이 나오면서 거듭제곱 법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촉발되던 때였다. 물리학자들은 자연 시스템에서 거듭제곱 법칙을 분석해 본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경제물리학자(econophysicist)들이 주식 시장 데이터들 쳐다보기 시작했다.
  • 그들 중 보스턴 대학의 진 스탠리는 흥미로운 계산 결과를 내놨다. 주식 시장이 전통 경제학이 주장하는 대로 랜덤워크를 따른다면 1987년 블랙 먼데이 대폭락이 일어날 확률은 10-148% 였다는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작은 단위인 플랑크(plank) 길이가 10-33cm 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얼마나 작은 값인지 가늠할 수 있다. 따라서 시장이 임의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다가 그런 대폭락을 겪는 경우는 엄청나게 일어나기 힘들다는 얘기다. 가우시안 분포나 랜덤워크는 표준 편차 5보다 더 큰 변동을 거의 겪지 않는다. 그러나 주식 시장 대폭락과 같은 데이터를 보면 표준 편차 5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큰 편차를 갖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스탠리와 그의 동료들은 모든 주식 거래를 대상으로 1994년부터 1995년까지 5분마다 표본 추출을 했다. 대상은 미국에서 가장 큰 1천 개 기업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4천만 개나 되는 대량의 데이터를 컴퓨터를 통해 고속으로 처리하기 싲가했다. 주식 가격의 변동은 분포의 꼬리 부분에서 거듭제곱을 따른다는 게 분명했다.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이들은 1962년에서 1996년까지 35년간에 걸쳐 6천 개의 미국 주식들을 대상으로 3천만 개의 1일 데이터를 조사했다. 이런 기록들 역시 거듭제곱 법칙을 보여주었다. 전통 경제학자는 스탠리가 조사했던 데이터들은 단기간인 5분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비가우스적(non-Gaussian) 모습이 나왔을 뿐 좀 더 긴 기간을 대상으로 하면 가우스적으로 될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스탠리는 5분에서 6,240분 --16일을 넘어서면 어떤 강한 결론을 내는 데 충분한 데이터를 얻기 어렵다-- 에 이르는 기간을 세 번 --길이 순으로-- 변화시켜 보았다. 기간이 길면 좀 더 가우스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거듭제곱 법칙을 따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이런 연구 결과는 주식 시장이 전통 경제학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변동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시장이 거듭제곱 법칙을 따를 경우 검은 월요일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10-5에 가까워진다. 이는 언제인지 몰라도 100년에 한 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 놀랍게도 다른 경제적 데이터에서도 거듭제곱 법칙은 분명히 나타났다. 로버트 액스텔은 1997년 미국 센서스 데이터를 사용하여 1명 이상을 고용한 550만개 기업을 분석했는데, 종업원 수로 측정한 기업드르이 규모 또한 거듭제곱 법칙을 따른 다는 점을 발견했다. 스탠리와 연구 팀은 국가의 GDP 성장은 물론이고 기업의 매출 성장도 마찬가지로 그 규모가 거듭제곱 법칙을 따른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주식 시장은 왜 변동성이 큰가?

  • 주식 시장이 전통 경제학에서 예측하는 것보다 훨씬 변동성이 큰 이유는 무엇인가? 초기 산타페 연구소에서 경제학 미팅에 참석했던 물리학자인 도인 파머와 그의 연구 협력 팀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고 믿고 있다. 요점은 주식 거래소에서 우리는 두 가지 형태의 거래를 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시장가 주문 --시세대로의 매매 주문 또는 성립가 주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다. 거래자가 이용 가능한 가장 좋은 가격에 주식 X를 바로 매수하거나 매도하라고 말하는 주문이다. 또 하나는 제한 주문이다. 거래자는 가격이 100달러 떨어지면 주식 X를 매수하라고 하고, 반대로 가격이 100달러 오르면 주식 X를 매도하라고 말한다. 이 경우 100달러는 거래자가 거래를 준비하는 제한선이다. 시장의 모든 주식에 대해 제한 주문을 기록한 제한 주문 장부가 있다.
  • 제한 주문 장부는 아직 충족되지 못한 주문들을 위한 일종의 재고 장치와 같은 것이다. 거래자가 주식 X에 대해 100달러에 매수 제한 주문을 내고 현재 가격이 110달러라면 이 주문은 가격이 100달러로 떨어져 매수 주문이 이루어지거나 주문이 취소될 때까지 이 원장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제한 주문 장부를 보면 무엇이 최선의 매수 제안이고, 또 최선의 매도 제안인지 알 수 있다. 예컨대 최선의 매수 제안은 100달러이고, 최선의 매도 제안은 102달러일 수 있다. 이 둘의 차이를 '매수 호가-매도 호가 범위(bid-ask spread)'라고 한다.
  • 이제는 새로운 시장가 주문이 제한 주문 장부에서 일치하는 것이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모든 거래소가 공유하는 두 가지 규칙이 있다. 바로 가격 우선과 시간 우선이다. 앞서 시장가 주문은 지금 바로 당신이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가격에서 내는 매수 또는 매도 주문이다. 가격 우선은 주문 장부에서 최선의 가격에서 시작해 맺을 수 있는 주문은 다 체결하고 그 다음 최선의 가격 수준으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시간 우선은 주문 장부에 똑같은 가격에 두 개의 제한 주문이 있을 경우, 먼저 낸 주문이 우선적으로 맺어진다는 의미다.
  • 이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새악하자. 당신은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주식 X를 1,000주에 사달라는 시장가 주문을 내고 당신의 주문을 거래소로 송부한다. 현재 주문 장부에서 최선의 매도 제안은 102달러에 나온 제한 주문이고 그 가격에 가능한 주식 수는 200주다. 이 시스템은 우선 그 가격에 200주를 확보하고 아직 800주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그 다음 최선의 가격을 찾아 나선다. 그 결과 105달러에 300주 매도 주문을 발견하고 이 주식을 매입한다. 그러나 아직 500주가 남아있다. 다시 주문 장부를 조사해 그 다음 최선 가격을 조사해 본 결과 107달러에 200주 제한 매도 주문, 그리고 역시 같은 가격에 600주 제한 매도 주문을 찾아낸다. 그런데 200주 매도 주문이 주문 예약 장부에 더 오래 기록돼 있었다고 가정하면 시간 우선을 적용해 우선 이 주문부터 먼저 받아들인다. 그리고 두 번째 주문에서 300주를 더해 500주를 채운다. 당신의 주문은 이제 다 채워졌으며 평균 105.4달러에 거래가 이루어졌다. 현재의 주문 장부에 상황에서는 이것이 1,000주를 매수할 수 있는 최선의 가격이다. 1,000주 거래가 끝남에 따라 이제는 107달러에 이용 가능한 300주가 남아 있는 최선의 매도 호가다. 당신이 낸 1,000주 시장가 매수 주문의 영향으로 매도 가격은 102달러에서 107달러로 올라갔다. 파머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즉, 제한 주문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떨어지는 눈처럼 주문 장부에 뿌려지면서 가격 수준별로 쌓인다. 그런 다음 시장가 주문 --또는 매수 호가와 매도 호가 차이 범위 내에 있는 제한 주문-- 이 나오면 주문서에 있는 제한 주문들이 나가게 되고 이로 인해 쌓여 있는 재고의 가격이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 파머와 그의 팀은 주문 완성 과정과 제한 주문 장부의 구조가 어떻게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들은 주문 장부에 대한 완전한 열람과 함께 거래별 데이터를 보여 주는 런던 거래소로 가서 가장 많이,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6개 주식을 대상으로 데이터를 분석했다. 전체적으로 연구자들은 약 4천만 건 이상을 분석했는데, 여기에는 주문 발주와 취소도 포함됐다. 파머와 그의 팀은 큰 가격 변동의 원인은 주문서 자체의 구조라는 점을 발견했다. 주문서에 쌓인 주문들 간의 가격 수준 차이가 클 때 큰 변동이 일어났다. 
  • 이에 대한 보기로 이들은 글로벌 제약 회사 아스트라제네카 주식의 거래 순간을 관찰했다. 그들이 연구했던 특정 시점의 아스트라제네카의 제한 주문서에는 31.84달러의 소량의 매도 주문과 그다음에는 이와 큰 차이가 나는 32.3달러의 제한 매도 주문이 있다. 그 후 한 건의 소량의 시장가 매수 주문이 들어왔고, 매도 호가는 한 번의 거래로 31.84달러에서 32.3달러로 올랐다. 46펜스가 올라간 1.4% 증가였다. 이 한 번의 거래, 그것도 2만 8천 달러 정도인 작은 거래로 주식 가격은 23펜스 올랐다. 이로 인해 아스트라제네카의 전체 시장 가치는 3억 7,400만 파운드가 올랐다. 그러나 그날 신문에 특이한 뉴스는 없었다. 이렇게 큰 시장 가치의 변화는 단지 주문 장부에 쌓여 있던 주문 패턴의 인위적 구조에 따른 결과다. 



  • 추가적인 분석에서 파머와 그의 연구 팀은 이런 일들이 꽤 흔하며, 제한 주문서는 일반적으로 덩어리처럼 뭉쳐 있으면서 동시에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밝혀냈다. 규모가 크고, 유동적인 주식의 경우조차 제한 주문은 30개 정도의 가격 수준에 몰려 있고 나머지 가격 범위에는 대부분 비어 있어 격차가 발생한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제한 주문은 최선의 매수, 매도 가격 주위에 몰려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지 모른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팀은 주문들이 주문 장부 전체에 걸쳐 퍼져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현재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 수준에서 매도 주문을 고집할 수도 있다. 가격이 결국 상승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주문 패턴이 고르지 못하고 가격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 전문 거래자들은 큰 주식이라고 하더라도 생각보다 유동성이 작고, 들어온 주문들의 패턴도 그렇게 고르지 못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큰 거래를 시간에 따라 조금씩 하는 이유다. 다시 말해 한 번에 큰 거래가 일어나면 가격이 너무 크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머와 그 동료들의 연구가 나오기까지 이런 고르지 못한 주문 패턴이 주식 변동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주문 예약의 수학적 모델을 만들고 임의의 거래를 할 때 --다시 말해 아무런 실제 뉴스가 없을 때-- 예약 주문의 구조는 그 자체로 중요한 변동성의 원인이라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또한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작고 거래량이 적은 주식들의 경우 크고 유동성이 큰 주식들보다 변동성이 더 크다는 점도 보여주었다.
  • 후속적인 연구에서 파머와 그의 동료 마이크 스자볼크스는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제한 주문 장부에 있는 주문 발주 패턴을 자세히 조사해 봤다. 그들이 집중적으로 본 변수는 현재 최선인 매수-매도 범위와 새로운 제한 주문과의 거리 패턴이었다. 예컨대 현재 최선의 매수-매도 가격 범위가 100달러에서 102달러라면 매도 제한 주문이 101달러, 102달러, 103달러 등의 가격에 이를 가능성은 얼마인가? 또 매수 제한 주문이 101달러, 100달러, 99달러에 이를 가능성은 얼마인가? 연구팀은 주문들이 매우 규칙적인 패턴을 따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패턴은 매수-매도 호가 범위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학생 분포'의 모양새 --마녀가 쓰고 있는 끝이 뾰족한 모자-- 다. 파머와 스자볼크스는 주문 패턴의 규칙성은 주문을 발주하는 거래자들의 행태에도 어느 정도 규칙성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거래는 예측하기 어려운 새로운 사건들로 파생된다는 전통 이론과는 상반되는 결과다. 파머와 스자볼크스는 이 연구 결과를 제한 주문 장부에 대한 그 전의 연구와 결합했을 때 자신들이 연구했던 주식들이 나타낸 이른바 거듭제곱 법칙에 의한 변동성을 거의 비슷한 정도로 재생할 수 있었다.
  • 그런 연구 결과는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뉴스들이 주식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아스트라제네카가 투자자들이 놀랄 그런 결과들을 발표하면 그 주식은 반응할 것이 분명하다. 제한 주문 장부는 많은 경우 기억의 한 형태로서 또는 그 안에 내재돼 있는 주문 패턴은 해당 주문들이 발주될 당시의 뉴스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 뉴스의 창고로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식 가격 변동 중에는 현재의 뉴스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대신 새로운 주문과 그 주문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장부의 특정한 주문 패턴이 상호 작용하면서 나오는 일종의 인공 산물인 경우들도 많다는 것을 이 연구 결과는 보여 주고 있다.
  • 일부 전통 경제학자들은 이런 가격 변동은 무시해도 되는 하나의 단기적 잡음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 모른다. 이에 대한 파머의 대답은 두 가지다. 우선 제한 주문의 영향은 결코 단기간에 끝나 버리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파머와 그의 연구 팀은 또 같은 변동성 분포가 훨씬 더 긴 시간 척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음으로 그것은 임의적인 잡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격 변동의 거듭제곱 법칙은 앞서 샆펴 보았던 맥주 게임에서의 진동이 해당 시스템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과 같이 시스템 그 자체의 구조에서 파생된다는 얘기다. 파머의 연구 결과는 개별 주식에만 적용되는게 아니다. 
  • 많은 측면에서 맥주 게임과 파머 연구 팀 모델이 던지는 시사점들이 같다. 경기 사이클과 주식 가격 변동 등 복잡한 창발적 현상들은 세 가지 근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시스템 참가자들의 행태다. 앞에서 보았듯이 실제 인간들의 행태를 보면 규칙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맥주 게임 참가자들이 보여 준 '일단 닻을 내린 다음 조절하는 규칙'일 수도 있고, 주식 주문에서 '학생 분포'를 보여주는 그런 규칙성일 수도 있다. 둘째, 시스템의 제도적 구조가 매우 중요하다. 맥주 게임에서 제조업자와 소매업자들 간의 공급 체인 구조는 참가자들의 행태와 결합해 진동을 일으키는 그런 역동성을 만들어 냈다. 주식 시장의 경우에는 제한 주문 시스템의 구조가 거래자들의 행태와 결합, 거듭제곱 법칙이라는 변동성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시스템에 대한 외생적 투입 요소들이다. 맥주 게임에서는 고객 주문 한 번만에 뜀박질할 경우였고, 주식 시장에서는 뉴스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외생적인 충격이 시스템의 역동성에 불을 붙이고 촉발에 기여한다는 것은 물론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외생적 충격이 하나의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불행히도 전통 경제학에는 이른바 균형이라는 굴레 때문에 이 요소에 너무 초점이 맞추어졌고, 그 바람에 앞의 두 가지 근원이 희생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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